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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Dec 04. 2023

우울증에게 완전히 잡아먹히길 (피학증)

피학증적 성격이란?

언젠가부터 내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사고인가?

대략 10일 간 사유한 결과 몇 가지 원인을 찾아내었다. 상담선생님께 그 얘기를 꺼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리서치 결과, 내가


피학증적 성격

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피학증:

궁극적인 가치를 위해 당장의 고통을 자초하는 것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 보이는 표면상의 ‘미친 짓’ 이면에 나름의 논리와 이유가 있는 경우가 그렇다. 피학증의 정도는 일 중독부터 정신병적으로 자해를 하는 것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나타난다.


공허감에 빠진 우울증 환자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자해를 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 또한 나의 경우,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임의로 먹지 않은 적이 많다.



 나는 왜 우울증이 낫지 않기를 바랄까?

 나는 왜 임의로 단약을 할까?



고통을 추구하게 되는 가설 중 하나는, 고통 그 자체를 추구한다기보단 대안이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불쾌감을, 무의식적으로는 만족감을 얻게 된다. 피학증적인 사람은 또한 현실적인 문제 해결보다 도덕적 승리에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다.


ex. 착취를 당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자기주장을 하는 대신 순응하여 상대로 하여금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 자신이 헌신적이라는 무의식적 만족을 얻음


피학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예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런 행동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하며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면 예상되는 처벌을 미리 촉발함으로써 불안을 경감하고 자신에게 힘이 있음에 안도한다.



우울-피학적 인격 장애라는 것도 있다. (내가 여기 해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초자아가 강력하거나, 타인의 사랑과 수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격성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우울-피학적 성격의 ‘초자아’는 과도하게 심각하고 양심적이며 업무적 성과와 책임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매우 믿음직스럽지만 자신에게 엄격하고, 스스로 매우 높은 기준을 세운다.




나의 피학성은 아래의 네 가지 궁극적인 가치(초록색으로 표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나의 기만이 용인되기 위해 더 아파야만 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만족감:

도덕성을 인정받고 용인되는 것. (‘나는 도덕적이다.’)


나는 비교적 고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성장한 환경 자체는 좋은 편에 속한다. 금전적으로 부족했던 적도, 사랑을 받지 못한 적도 없다. (환경은 좋았지만 적응장애가 생겨서 힘들었던 건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걸 몰랐다.) 그럼에도 유달리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보며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스러웠다.


‘나 같이 운 좋은 놈이 이렇게 힘들어해선 안돼.’


라고 생각하던 참에, 우울증은 내가 힘들어할 명분이 되어주었다. 혹은 과거의 그런 기만적인 사고에 대한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현재는 더 이상 이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상담을 받으면서 바뀌었다.)



“주변인들에게 보살핌 받고 싶어. “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만족감:

평소엔 얻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


학창 시절의 나는 어려움이 닥칠 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내 우울과 불안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힘들다고 표현하는 걸 잘 못 한다. 가면 우울증이 심해서 밖에선 해맑고 밝은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늘 혼자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나 우울증을 진단받고 상처가 표면에 드러나면서 부모님과 친구들이 날 대하는 게 달라졌고, 이 변화가 참 좋다.

나는 스무 살이다. 어른 행세는 그만하고 싶다.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고 싶다.



“어깨 위의 짐들을 내려놓고 싶어. “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만족감:

무거운 책임과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부터의 해방


올해 재수를 하면서, 내 상태가 좋아지면 하기 싫은 공부를 하고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차라리 날 짓누르는 우울감에 빠져 있는 게 나았다.



“더 힘들어질 미래에 대비해야 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만족감:

더 큰 고난에 미리 대비 가능


이게 내가 약을 안 먹은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이유이다. 약을 먹어서 상태가 좋아지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적군 앞에서 무기와 갑옷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느낌이다.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을 겪다가 고통이 덜해지면, 고통에 대한 익숙함이 사라질 거고, 그렇다면 다음에 더 큰 고통이 올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의식 수준에서는 내가 더 힘들어질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다음번 파도(고통)를 걱정하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휩쓸려버릴 적은 가능성을 차단하고, 대신 현재의 작은 파도를 안정적으로 막아내는 걸 택한 것이다.




내 분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피학증적이라는 건 거의 100%다. 나는 여전히 약을 잘 챙겨 먹지 않고 있다. 우울에게 완전히 잡아먹혀 내가 나를 포기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죽음’을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가치이자 목표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유야 어찌 됐든 감히 건방지게 한 번 더 말해보자면, 나는 낫기 싫다. 성과에 대한 부담에서 멀어져서 주변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잔뜩 받으며 자기 연민에 젖고 싶다.


이 ’어쩌다보니 견뎌지는 지옥‘에 계속 빠져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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