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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Mar 03. 2023

매니큐어를 바른 공룡

영화 <장난감> - 한준희 감독 

아이들은 경계를 모른다. 소방관도, 선생님도, 대통령도, 연예인도 하고 싶은 건 자신의 가능성에 경계선을 긋기 전이기 때문이다. 요정이나 순록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구분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이들의 마음에 경계선을 그려놓기 전까지 아이들은 모든 사회의 틀에서 자유롭다. 



크리스는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다. 놀이방에는 공룡 모형이 가득하고, 공룡이 그려진 옷을 입고 공룡 인형을 가지고 논다. 다만 누나인 그레이스가 알지 못했던 것은, 크리스는 공룡도 좋아하지만 반짝거리는 매니큐어도, 바비 인형 놀이도 좋아한다는 거다. 크리스에겐 공룡과 매니큐어의 경계가 없다. 공룡의 뾰족한 이빨과 비늘에 반짝이 매니큐어를 바르며 즐거워한다. ‘공룡도 예뻐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크리스는 왜 자신이 공룡은 가지고 놀아도 되고 매니큐어는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크리스는 그 경계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레이스와 크리스, 분홍색 옷과 초록색 옷, 분홍색 화장대와 파란색 램프, 반짝이 매니큐어와 공룡 모형 같은 일차원적 도식이 크리스를 가둬놓는다. 그런 안에서 크리스는 주눅 들어있다. 매니큐어를 가지고 논 다음이면 깨끗이 손을 씻고 매니큐어를 주머니 속에 숨겨 흔적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 거라는 누나의 말에 대꾸는커녕 놀란 얼굴로 아빠를 쳐다만 본다. 



그런 크리스가 자기다워질 수 있는 건 모두 잠든 후 놀이방에 몰래 숨어들어갈 때 뿐이다. 크리스가 공룡과 바비 인형 중 어떤 걸 가지고 노는지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던 크리스와 그레이스의 놀이방에 그어진 경계선이 허물어진다. 공룡이 반짝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바비 수영장의 인형들을 공룡이 습격한다. 크리스는 공룡 모형과 바비 인형, 매니큐어 병이 한데 섞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크리스에겐 공룡과 매니큐어의 경계가 없다는 걸 이해했을 때, 아빠는 기꺼이 자기 자신과 반짝이 매니큐어의 경계를 허물어 보인다. ‘아빠도 예뻐지고 싶어’라는 말은 공룡과 매니큐어 사이에 세워진 벽을 깨고 들어가 크리스에게 내미는 손이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경계 밖으로 나와도 괜찮음을 깨달았을 때 크리스는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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