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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Sep 28. 2022

뻔하지만 어려운 정답, 눈높이.

육아에 관한 뻔하고도 흔한 이야기.

주홍빛으로 노을  하늘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 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사진이 찍고 었다. 핸드폰 카메라의 각도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쩐지 유독 아름답던 그날의 하늘과 노을의 아름다움을 두고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대상을 바로 향하여 보다. /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자신의 시각으로 관찰하다. /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일에 기대나 희망을 품는다. 바라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육아와도  의미가 다르지 않다.

 

여섯 살 아들의 유치원 영어학습교재에 부정문이 있었다. ‘isn’t it?. 벌써 부정문을 배운다고.?‘ 그제야 5살만 되어도 생활 영어 정도는 술술 말하기도 하고, 한자로 제 이름을 쓸 줄 아는 아이도 있다는 말에 현실감이 생겼다. 영유아기의 학습 성취도가 학습 변별력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여기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며칠 전 아들의 또래 친구와 키즈카페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들의 친구는 ‘어른은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을 곧잘 읽었다. 내심 부러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던 순간에 아들은 천진하게 말했다. “엄마, Y가 저기 안내문을 읽었어. Y는 한글을 읽을 줄 아나 봐.”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앉은자리에서 읽어주는 동화책은 열심히도 듣는 아이가 금세 흥미를 잃고 장난을 치기 일쑤였다.      


영상 보기를 좋아하는 아이니 태블릿 PC를 활용해 한글이나 코딩, 수, 영어를 익히는 학습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주말에만 30분 남짓의 동영상 시청이 허락되는 아이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터치에도 익숙지 않은 아이가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로 학습에 임했다. 도와달라는 교구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에 적극적이었다. 캐릭터를 돕기 위해 열심히 글자를 따라 말하고, 쓰기를 반복했다. ‘고마워’하는 캐릭터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였다. 부끄러웠다. 아이는 지도만 있는 엄마와의 공부 방식이 지루했을 뿐, 배움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니까 가을이 온 것 같아요.” 유창하게 말한다고 해서 유창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야말로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영어를 가까이했음에도 영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 않던가. 한 번도 글자를 배운 적 없는 아이가 단번에 깨치기를 욕심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글자가 아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화되지 못하는 순간의 망설임. 읽어내지 못하는 시간 사이에 엄마의 미간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입꼬리가 쳐졌겠지. 책 보다 엄마의 얼굴을 먼저 살피는 아들이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엄마의 표정 변화를 놓쳤을 리 없다. 종종 쳐져 있던 아들의 어깨가 떠올라 마음이 아렸다.


일주일의 무료체험 기간이 끝났다. 학습 프로그램을 계약하는 대신 아들과 매일 15분씩 공부하기로 했다. 책임이 앞서 무책임해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더 많이 칭찬하고 더 자주 격려했다. “‘우’와 ’ ‘ㄱ(그)‘는 아는데 합쳐진 소리는 모르겠어요. 엄마가 읽어봐요.’/ 대단하다, 우리 아들! 우와 그를 아는구나. 둘을 합치면 우그우그-욱! 따라 해 볼래?” 제 발로 서고 뛰고 웃기만 해도 따르던 과장된 칭찬들을 왜 학습 앞에서는 유독 아꼈을까. 늘 온화할 수는 없지만 기대가 앞설 때마다 되뇌곤 한다. ‘아들은 말 잘하는 외국인이다.’    

 

지난달부터 아들은 생일을 맞은 유치원 친구들에게 서툴게나마 직접 축하카드를 써 보내고 있다. ‘친구야, 생일 축하해.’ 종이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아들은 꾹꾹 눌러쓰는 글자에 진심을 담는다. “엄마, 이거 친구가 좋아하겠지, 엄마, 친구 이름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엄마, 엄마….” 아들은 언제나 바로 보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바라보지 못한 건 대부분 나였을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자주 나는 자신의 불안으로 전전긍긍하게 될까. 여전히 자신이 없다. 유심하게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아이의 눈높이를 견주어본다. 눈높이라는 뿌듯하고 다정한 단어를 가만, 가만히 읊조려 본다. 감사함의 반대는 당연함이라고 했다. 바라봄에 있어, 육아에 있어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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