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인드박 Jun 24. 2019

직장인 왕따에서 해외파견까지

사무실에서 왕따로 살아남는 기술

"OO에서 일하셨다면서요? 아 근데, 거기 망하지 않았나요?"


파트장 A가 웃으면서 물었다. 새로운 회사의 입사 첫날, 양복을 입고 출근한 나는, 내가 봐도 유독 튀었다. 5년 만에 꺼내 입은 양복은 그 시간 동안을 지낸 노트북처럼  움직일 때마다 비걱거리고. 새로 옮긴 회사의 첫 미팅 자리, 팀장은 파트장끼리 1층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만난 첫인사 자리에서, 그는 내 전 회사의 이야기를 물었다. 망했다고 해야 하나, 아님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하나. "요즘 많이 힘들죠"라고 중도를 택했다.

(출처-픽사베이)

사무실은 일사불란했다. 누가 봐도 나는 '오늘 새로운 입사한 경력사원'이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있었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났고, 집에 돌아오니 와이셔츠가 젖어있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왕따 생활은. 팀장은 소위 월급루팡이었다. 일을 하지 않았다.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스타일. 파트장 A가 실질적인 팀장이었다. 하루 이틀 일해보니, 모두가 A에 맞추어 일을 하고 있었다. A는 자기주장이 강했고, 경쟁심도 센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을 협력사에서 일하다, 갑회사로 발탁된 케이스였다. 그만큼 업무의 구석구석을 잘 알았고, 심지어 팀장이 모르는 내용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 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A는 나에게 항상 겉으로는 호의적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자료 공유를 하지 않거나, 미팅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A의 주변으로 퍼졌다. 나는 팀의 신규 파트에 파트장이었고, A의 파트에  옮긴 인원 3명과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능력과 열정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름뿐인 파트장이 되었다. 팀장이 자리를 비우면, 회의 참석은 A가 대신했다. 그리고, 나에게 관련 업무를 지시했다. A는 본인 혼자 팀장대행 역할이 힘들다며 나를 보며, 공개적으로 불평을 했다. 내 파트원들을 데리고 미팅을 하기도 했다. 이미 전 파트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A의 사람들이었다. 미팅을 다녀오면, A와 팀원들이 모두 식사를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팀장은 어느새인가, 업무적으로 업무외적으로 나에게 불만을 표시했고, 팀장은 그럴 때마다 A와 같이 있었다. 퇴근하는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다.

당장 떠오르는 결론은 퇴사였다. 하지만, 나는 당신 신혼이었고, 외벌이 가장이었다. 회사 앞으로 마련한 신혼집의 절반은 대출이었기에, 퇴사는 곤란했다. 아무리 밤새 고민을 해봐도,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회사에서 생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어떻게든 버티자'라고 생각하니, 하나둘씩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보였고, 실천을 했다. 절박하게.

출처-픽사베이

  

1. 운동을 하자!

매일 칭찬과  격려와는 거리가 먼 회사생활, 나는 팀장과 A의 스트레스로 인해, 단 걸을 찾았다. 체중을 갑자기 불어서 입사 전보다 5kg는 걸 알았다. 몸이 무거우니, 정신도 맑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회사 내 수영장을 끊었다. 어차피 점심시간도 즐겁게 식사하기가 쉽지 않으니, 수영을 제대로 배우고자 결심한 거다. 그 날부터 점심시간은 1층 슈퍼에서 김밥으로 대신하고, 점심시간마다 내려가 수영을 했다. 물속에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오직 숨쉬기, 레일 끝만을 생각했다.


2. 다른 네트워크를 찾자!

점심시간에 수영을 시작하자, 1~2주가 지나자, 자주 보이는 회사분들이 보였다. 다른 본부분들이었다. 점심시간 엘베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업무와는 연관 없지만,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3주 차가 되자, K과장과 1층 매점에서 음료수를 나눠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L차장님도 K과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매일 팀과 본부 업무에 매몰되어 살았는데, 다른 본부의 이야기를 들으니, 회사 사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3. 자기 계발을 하자!

L차장이 싱가포르 파견을 가자, 잘 몰랐던 해외사업이 실감이 났다. 회사에서도 국내 사업보다 해외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시점이었다. 나의 팀장은 절대 해주지 않을 이야기들을 L차장과 K과장에게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났다. 그 날부터, 전화영화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몰래했다. 팀장과 A가 알면 분명히 뭐라고 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몰래 폰부스에 수첩을 들고, 거래처와 연락하는 척하며, 전화영화를 매일 하게 됐다.


4. 때를 기다린다!

수영을 시작하면서, 회사생활이 예전보다 활력이 났지만, 그렇다고 나의 회사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의 팀 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지 않았다. 이것이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팀 내 고문관과 왕따를 맡고 있었다. 점심시간, 수영이라는 회사생활의 활력소를 찾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여전히 같았다. 전화영화를 매일 한다고 영화회화 실력이 늘지 않는 것처럼, 한번 왕따로 낙인이 되면, 그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기획안은 번번이 드롭이 됐고, A는 파트와 함께 실적을 계속 내었다. 파트원들 일부는 A파트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럴수록 회사 업무를 놓지는 않았다. 무조건 버티기였다. 다만, 신혼이라 회사 외적으로 행복한 시기라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5. 기회를 발견하면, 용기를 내라!

입사 1년이 지난 어느 날 K과장이 불러나 나갔더니, 그 자리에서 해외영업 P팀장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미국 파트너사와 일할 수 있는 영어를 잘하는 과장급 인력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생각나서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P팀장에게 옮길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가 다시 보자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나의 레퍼런스가 안 좋다고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역시 세상일은 쉽지 않구나. 큰 좌절을 했다.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6개월 뒤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해외사업본부에서 진행하는 이란 프로젝트가 있는데, 선 듯 아무도 가지 않는 상황이라고, 나에게 지원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 이란 테헤란에서는 IS테러가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가겠다고 했다.

(출처-픽사베이)

그렇게 나는 이란을 3개월 다녀왔다. 팀장과 A는 해외본부에서 나를 찍어서, 파견 요청이 온 것을 알고 무척 놀랬다. 하지만,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나를 흔쾌히 보내는 걸 승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그 타이밍이 이란을 가는 내게 조금의 안쓰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게 어찌 보면 내게는 행운이었지만, 이란 출장 복귀 후에, 현지에서 근무했던 분들이 소속해 있는 해외사업본부로 발령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팀을 옮기면서, 회사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늑했던 그 시간, 다시 돌아가라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를 망설이는 당신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