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화초

2006

by 손덕중





담벼락에 그어진 낙서를 봤어?


현수막들, 꽁초들, 타버린 연기 위에 새겨진 이름


빈 병 하나 주워 호수로 가, 저녁내내 물결을 구경했지


바람은 귀를 통해 들어와, 이빨은 빈집의 가구처럼 덜컹이고


혀는 말라버린 껌처럼 단단하다




어릴 땐 쉽게 사랑을 했는데 말이야


술에 취해 대문을 두드리고


칸트를 읊다가도 개처럼 오줌을 쌌다


양복을 빼입고 법학도처럼 안경 쓰고 다니면서


죽도록 패놓고도 저녁 내내 사랑한다 소리치곤 했지


모든 게 달라질 거라 약속하고,


새출발을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하고, 손가락을 걸고,


터진 입술로 입을 맞춰도


다음 날이면


어항의 물은 흐리기만 했다


하는 일 없이


말라버린 화초들


구겨진 신문지들


사설은 정중한 어조로 나를 비난했다




차마 말 못할 꿈을 꾸다 일어나곤 했어


침대 끝에 앉은 네게 행패를 부리고


접시를 깨뜨리고 넥타이를 매고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뛰쳐나갔지


그러고는 돌아와 너의 실루엣을 정성스레 쓸어 담았다


너의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박고 누워있었다


막연하지만 너는 나의 마음을 알 거라 생각했다


점심엔 혼자 돌같이 차가운 밥


저녁엔 번화가를 쏘다니며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면서


흉을 보았지, 그게 나의 이론이었다.




차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옆을 지나갔다


나는 도통 제목을 떠올리지 못했다


나의 오역들, 꼬여버린 자소서들, 뒤엉킨 머리카락


공처럼 거리를 굴러다녔고


바닥난 향수병


고양이 오줌 같은 냄새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나의 담들


여자들은


담벼락을 따라


손톱으로 담을 할퀴며


이 계단을 내려갔겠지


담 위에 세워진 깨진 유리병


내 가슴팍을 찌르려고 양파 썰던 칼을 꽉 쥐었겠지


그러다 물이 끓으면


주전자가 소리를 지르면


창을 타고 오르는 서리들만 점점 어두워져


말이 없어진 거실에는


보일러 소리만 요란하다




한바탕 세월이 지나고


담벼락에


이제는 누가 낙서를 하고 갔을지


하얀 서리가 덮인 말라버린 화초들만


행인의 발치에 바스락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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