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워닝] 이 글에는 암에 관한 실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주의를 요망합니다. 안타깝지만, 4살 조엘은 암에 걸렸습니다. 정확히는 비정형 유기형 간상 종양입니다. 작은 종양이지만 치명적이어서 의사는 조엘의 상태를 4개월 시한부로 진단합니다. 하지만 조엘은 해를 넘겨가며 버텨냈고, 이를 기적이라 판단한 부모 에이미 그린과 라이언 그린은 자신들이 겪은 과정을 게임으로 만들길 원했습니다. 예상 가능한 반박은 다 받았습니다. “암은 게임이 아니야”, 다시 말하자면 게임은 여러 번 플레이할 수 있지만, 암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백번 지당한 말입니다. 게임 개발자인 라이언 그린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목표를 조엘 살리기가 아닌 조엘을 행복하게 하기로 설정했습니다. 라이언은 나름의 답을 내놓습니다. “이 게임은 제 아들 조엘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저와 함께 잠시만 걷겠어요? 조엘과 놀아주실래요?” … 라이언은 놀이야말로 부모와 아이가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전합니다. 게임의 주요 플레이 방식도 아이와 놀기죠. 보통의 게임과는 다릅니다. 점프하기, 총 쏘기, 피하기 등 명확한 플레이 방식이 있어야 좋은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 보통이니까요. 특정 기술을 잘 습득하고 발달시킨 끝에 이뤄낸 성취는 플레이어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가 정말 성취로 결정되는 걸까요? 일을 할 때는 분명 성취가 중요하지만, 노력이나 성취가 작동하지 않는 분야도 존재합니다. 의사의 진단보다 오래 살아낸 조엘이 결국 세상을 떠난 것처럼요… 조엘에게도, 라이언에게도 그건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물론 에이미에게도요. 에이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조엘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었습니다. 용사 조엘이 암이라는 이름이 용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요. 하지만 이야기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경험을 어떻게 공감하게 할 수 있을까요.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영역일 것입니다. 게임 <댓 드래곤, 캔서 That Dragon, Cancer)>가 탄생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상에 들어가서 직접 인식하고 선택하니까요. 조엘이 고통 속에 우는 동안, 말로 달래고 자장가도 부르고 기도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울음을 그치고 나면 조엘과 함께 공룡 애니메이션을 8번 연속으로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조엘의 암을 치료할 순 없습니다. 플레이어는 뭔가를 할 수 있지만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 감정이 개발자의 의도였습니다. 모순적이죠. 게임과 정반대의 논리로 구성된 현실의 체험을, 게임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다니요. 라이언은 이 체험이 가진 가능성을 말합니다. 비극의 뒤안길에서 플레이어는 새로운 슬픔을 이해하게 되고,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로받습니다. 게임이라고 하면 흔히 경쟁과 보상, 중독 같은 단어를 연관짓습니다. 마냥 억울하다고 할 순 없지만, 게임이라는 매체는 플레이어에게 귀중한 체험을 주기도 합니다. 사랑과 돌봄을 체험하게 하는 이 사례처럼요. 교육학도 시절, 성인학습 강의에서 배운 대전제는 이랬습니다. “어른은 잘 안 바뀌는 게 기본값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생사를 오가는 정도의 큰 충격이 아니면 잘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대상입니다. 자기계발서나 이론서 몇 권 읽는다고 어른이 쉬이 바뀌지 않죠. 기초 지식이 토양이라면 밭을 일구고 열매를 수확하는 일은 또 다른 일처럼 보입니다.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기만 합니다.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쿠키런:킹덤>을 태어나 처음으로 플레이해보고, 인스타그램을 2분에 한 번씩 들여다봅니다. 행동을 바꾸려면 경험에서 얻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지만 기왕 바뀔 거 진심으로 감화되길 원한다면요. 그 경험을 가장 생생하게 제공해주는 매체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와 라이언은 우리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영광이 아닌 고난에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게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앉아서 지켜보는 대신 직접 경험하고, 만들어보려 합니다. 그게 플레이어의 방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