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수목금에 지친 당신에게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은유다 - 로버트 맥키

by 진성훈
자신의 직업을 걸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내 안의 무수한 감정조각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을 정확히 골라 톡 건드리고, 매만져주는 능력을 지녔다. 그런 그를 동경하며 열심히 쫓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무수한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책에서는 문장으로, 스크린에서는 캐릭터로, 이어폰 안에서는 음악으로. 각기 다른 모습인 듯 보였지만 언제나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매거진 <컨텐츠를 처방해드립니다>는, 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져도 전화할 사람이 없을 때 나를 위로해줄 이야기를 찾아다닌 기록이다. 사람에 치이거나, 일에 지치거나, 그냥 이유 없이 쳐지거나. 이번주는 그랬다. 내가 즐기고 위로를 받았던 컨텐츠가, 비슷한 상황의 다른 누군가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 믿으며 기록을 남겨본다.


1.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 대본집_한가람 작가


마음이 일렁거리고 갑갑해서 진정이 안 되는 날이 있다. 그게 오늘이었고, 나는 무엇이건 몰두할 거리를 찾으려 애썼다. 좀 걸어볼까 하다가 바람을 피하러 들어간 카페는 지난번과 달리 조용했다.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몸 힘든 건 싫고, 좋은 곳은 가고 싶나 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지친 날에는, 익숙하고 술술 잘 읽히는 책이 필요하다.


JTBC에서 방영된 단막극이 대본집으로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여름의 추억 대본집>은 너무 적절했다. 심리학에 빠져있던 사춘기 고등학생에게 방송작가를 꿈꾸게 만들었던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의 (한)가람 작가.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내게 '한가람'이라는 이름은 단숨에 드라마를 보게 만들었다. 너무너무 좋아서 아쉬울 정도였다. 대본집이 나왔다는 말에 잠깐 고민하는 척 하고는 구매했다. 그렇게 가방에 넣었던 책을 마침 오늘 꺼냈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책은 어렵지 않고 생생하게 읽혔다. 쭉 흘러가 버리는 영상과 달리 텍스트는 나만의 호흡으로 읽을 수 있어, 구석구석 모두 들여다봤다는 느낌이 든다. 순간 멈추기도 하고,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넘겨가며 바라보면 진한 감정이 더 디테일하게 다가온다.


사람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면서 다시 사람에게 돌아가는 한여름이라는 캐릭터가 와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당신이 한 번 실패한 뒤 그 무엇도 가지려 들지 않는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왜.. 실패를 나아가는 성장판으로 삼지 않는 거죠?


이런 식으로 인용할 문구를 찾자면 끝도 없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그건 읽고 난 다음의 감상이고, 가장 정확한 이 책의 공감대 리트머스 종이는 이 문장일 거다. 이 문구가 너무 공감된다면, <한여름의 추억>에 빠질 준비가 200% 된 거다.




지금의 내가 너무 거지같아서
누군가한테 사랑받았던 일들이 전부... 꿈같아.



https://goo.gl/R3ueZW




2. 흑역사 안내서_Netflix


친구가 사춘기 시절에 쓴 일기를 몰래 훔쳐볼 수 있다면? 넷플릭스의 <흑역사 안내서>에는 첫사랑 이야기는 물론, 온라인 채팅을 복붙해서 보관한 .txt 파일, 해리포터 팬픽까지 들어있다. 말 그대로 찌질의 역사일 거다. 역사적 가치는 몰라도, 스토리로는 최고인.


주인공 망해라! 가 베댓이었던 보기드문 웹툰...


누구나 찌질했던 과거가 있고, 숨기고 싶은 영역이 있다. 그래서 남의 찌질했던 과거는 "나만 찌질한 게 아니었어" 하는 공감과 안도감을 주고, 성인의 관점에서 귀여운 아이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흑역사 안내서>는 이 감성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다. 일반인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사춘기 시절 일기장을 읽는다는 컨셉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섭외와 사후편집에 공을 들인 덕에 키치한 내용을 매끄럽게 감상할 수 있다.


https://goo.gl/zDo718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특유의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면서 불쾌하지는 않은 정도의' 톤은 변함없다. 물론 MBC였다면 시청자 게시판에 "가족끼리 보는데 민망해서 채널 돌렸네요"가 도배될만한 내용들이지만. 사춘기, 체모, 형제자매, 성적, 키스 같은 테마를 다룬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에피소드는 '어울리기'와 '대중문화' 였는데, 특히 해리포터 광팬이었던 시절에 쓴 팬픽을 스텝들이 연기하는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소파를 때려가며 웃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해리포터, 말포이, 론의 삼각관계와 폴리아모리...


찌질한 사춘기라는 테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에피소드는 '어울리기'였다. 잘나가는 친구와 어울리기 위해 선을 넘었던 일이나 자신이 nerd였다는 고백을 보면서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사춘기 시절의 다이나믹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어서 울림이 컸다.


이런 <흑역사 안내서>의 메시지는 오프닝과 엔딩에서 반복된다.

오프닝 - 너만 찌질한 게 아냐!


그리고 공연장 바깥에서 관객의 코멘트를 보여주는 엔딩.

We're FREAKS

We're FRAGILE

and we all survived.


나만 남들과 다른 것 같고,

내가 너무 한심할 때.

그때가 <흑역사 안내서>를 감상할 최적의 타이밍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찌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친 듯이 웃을 수 있다.




+ 같이 감상하면 좋을 컨텐츠


1) Story_도다 세이지

단편만화 모음집이다. 이 작가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본질, "혼자가 아닌 사람은 없지.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거야."가 잘 녹아있다.


2) 나의 기념일_이이언

정말정말 우울할 땐 우울한 음악만이 위로가 된다.


3) Affection - Cigarrets After Sex

약간 검정치마스럽다. 읭? 하게 되는 밴드명이나, 무드를 형성하는 장악력이 닮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E2PJY1vK4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