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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진미보단 진미채볶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꽤 별거인 밥도둑

by radioholic
오늘은 또 뭘 먹나...


부엌에 계시던 엄마가 흥얼거리듯 혼잣말로 저렇게 얘기하실 때마다 어린 나는 의아했다. '밥이야 밥솥에 있고, 반찬은 그냥 엄마가 뚝딱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주 순진한 생각에서 나온 의아함이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뚝딱' 만들었을 것 같은 그 반찬들은, 엄마가 시장에 가서 여러 고민 끝에 사 오신 재료들을 이런저런 양념들과 함께 엄마만의 레시피로 공들여 만든 음식들임을 정말 늦게 알았다. 오죽하면 TV에서 오로지 세 끼니를 해결하는 것을 콘텐츠로 한 '삼시세끼'란 프로그램을 만들었을까.


우리 부부는 둘이 살기도 하고, 음식 솜씨 좋으신 양가 어머님들께서 수시로 김치와 반찬을 손에 쥐어주시거나 택배로 보내주시는 덕분에 반찬 걱정을 크게 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설령 반찬이 떨어졌더라도, 동네 상가나 조금 멀리 떨어진 시장에 있는 반찬가게에 가서 먹고 싶은 반찬을 사 오면 되니 정말 편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반찬 가게에 갈 때마다 내가 별 망설임 없이 먹어치우던 반찬들의 가격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특히 날 놀라게 했던 반찬 중 하나가 바로 진미채볶음이었다. 이게 이렇게 비싼 거였던가?


언제부턴가 오징어가 귀해진 탓인지, 마트에서 진미채 가격을 볼 때마다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만들어놓으면 하루 이틀이면 다 먹어버릴 걸 저 돈을 주고 사는 게 맞을까 하는 망설임에 내적 갈등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다행히 마트에서 진미채 묶음을 특가로 팔고 있어서(그래도 비싸다;;), 냉큼 집어와 진미채볶음을 만들어봤다. 내가 만드는 반찬 중에 와이프가 마음에 들어 하는 몇 안 되는 종목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진미채볶음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은 뚝딱 먹어 치우게 하는 밥도둑이기도 하니까.




만드는 법은 역시나 쉽다. 나 같은 요리 초보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레시피라고 말하기도 멋쩍은 조리 과정이다. 진미채를 2~4등분으로 자르고 마요네즈에 살짝 버무려 부드럽게 만든다. 프라이팬에 고추장과 설탕, 간장, 다진 마늘, 물(약간)을 넣어 졸인 뒤 진미채를 넣고 비빈다. 다 비빈 후 올리고당과 참기름을 넣어 다시 한번 비벼주면 그걸로 끝. 다진 마늘을 넣지 않으면 진미채가 그냥 달기만 하고 별 맛이 없으니, 반드시 다진 마늘을 넣어줘야 한다. 나름의 킥이랄까.


(집밥네컷) 뭐 그냥... 쉽습니다...


언제부턴가 식사량이 줄어서인지 요즘은 거하게 한 상 차리는 것보단 간단하게 먹는 게 더 편해졌다. 그래서 이런 진미채볶음 같은 똘똘한 밑반찬의 중요성을 점점 크게 느끼게 된다. 왜 엄마들이 밑반찬을 냉장고에 채워 넣으시고 그토록 흐뭇해하셨는지도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허기지지 않도록,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가격만 따지는 가성비로 본다면 진미채볶음이 그리 탁월하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거기에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감안한 가심비까지 따진다면 정말 좋은 음식이 아닐까. 어떤 산해진미에도 뒤지지 않는 진미채볶음의 힘이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너..




연휴의 마지막 날... 잠시 집을 비운 와이프를 기다리며 진미채볶음을 만들다가 문득 배가 고파져,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뒤적여 청국장찌개를 끓이고 계란프라이를 구워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혼밥을 하더라도 이젠 라면이나 배달 음식 대신 나를 위한 상차림을 만드는 게 점점 습관이 되는 듯하다. 마흔 넘어 시작한 부엌 생활이 이제 일상으로 녹아드는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하고 마음이 좋다. 아직은 이런 밑반찬 하나 만드는데도 버벅거리고 시간이 꽤나 드는 요리 초보 아저씨지만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지며...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의 오찬...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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