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물무침을 만들어 먹었다
와이프가 출장을 갔다. 너무 갑작스레 결정된 출장이었던 데다 원래 오늘 돌아오기로 했는데, 그곳에서의 상황이 변동되면서 일정이 연장되어 휴일임에도 덩그러니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이쯤 되면 와이프가 집을 비운 남편의 기쁨이나 희열이 담긴 글을 기대할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을 불러 낄낄대며 게임을 하거나 나가서 술을 마시기엔 좀 민망한 나이가 되어서인지 저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지는 꽤 오래된 일이다. 오늘은 더군다나 비까지 내려 어디 산책을 나가기도 애매해져, 집돌이처럼 집에서 혼자 놀기를 시전하고 있는 중이다.
와이프가 집에 없을 때 즐겼던 나름의 길티 플레져라고 한다면, 평소엔 눈치가 보여 먹지 못하는 라면이나 떡볶이, 순대 등을 실컷 먹는 것이었다. 심지어 다 먹지도 못하는 라면 2개를 끓여 면만 후루룩 먹고 국물은 버린다거나, 떡볶이/순대/오뎅을 1인분씩 사서 배 터지게 먹고 남은 건 버리는 플렉스를 즐기기도 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김영하 작가의 명작 소설 제목까지 공연히 들먹이면서. 하지만 언제부턴가 집에 혼자 있어도 라면이나 짜파게티 등 간편식에 점점 흥미가 없어졌다. 대신 내가 나를 위해 손수 무언가를 만들어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것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비록 퀄리티가 낮더라도, 적어도 몸에 해롭거나 아주 맛이 없지는 않으니까.
거실 창문 앞에 앉아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생각하며 비 오는 창밖을 보다가, 메인 메뉴 생각보다 문득 봄나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봄비가 내리고 나면 봄도 머지않아 가버릴 테고, 그럼 봄나물을 먹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예전에 배운 참나물무침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보니, 문득 파스타와 같이 먹으면 나물을 좀 더 상큼하게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예전 글에도 쓴 적이 있던 명란바질파스타도 함께 만들기로 했다. 마침 집에 새우와 명란이 남아있으니 냉장고 파먹기에도 딱이었다.
참나물무침은 레시피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만들기가 쉽다. 참나물 줄기의 지저분한 곳을 떼어내고 나물을 씻은 뒤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참나물만 들어가면 심심하니 당근을 채 썰어 넣으면 식감도, 색감도 모두 좋아진다. 거기에 양념으로 설탕과 고춧가루, 식초와 참기름을 넣고 간은 멸치액젓으로 맞춘다. 양념을 다 넣은 뒤 나물을 꽉 쥐지 말고 조심스레 조물조물 버무리면 그걸로 완성되는 아주 간단한 메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고 재료도 간소함에도 먹을 때의 만족감이 큰 것을 보면 가성비가 엄청난 메뉴이기도 한 셈이다.
도마 위에서 나물을 자를 때의 풍겨 나오는 향을 맡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청량해진다. 꽃 향기뿐만 아니라 나물 향기에서도 봄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저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을 채취해서, 특별히 조리할 것도 없이 살짝 양념만 묻혀 먹는데 왜 이리도 맛과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물이 제 몸에 품은 향과 풍미만으로도 사람의 미각을 이토록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가공된 음식이 아닌, 재료 본연의 특성을 느끼면서 먹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건, 내가 이젠 부정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방증 같아서 내심 흐뭇해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저 상실의 과정만이 아니라, 어릴 땐 몰랐던 좋은 것을 체득하는 과정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하여 오늘의 메뉴는 참나물무침과 오미자에이드를 곁들인 명란바질파스타가 되었다. 파스타를 한입 잔뜩 먹고 나니 올리브유의 기름기가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러고 나서 입에 넣은 참나물무침은 파스타의 기름진 맛을 혀에서 중화시키고, 아주 상큼한 식감을 가져다주며 다시 파스타를 먹고 싶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면 조절에 실패해 파스타의 양이 꽤 많았음에도 전혀 느끼함 없이 한 접시를 뚝딱 비워냈다. 어쩌면 피클보다는 나물무침이 파스타와 더 궁합이 좋은 것이 아닐까. 파스타에 무엇을 곁들여먹을지 고민인 분이 있으시다면, 조심스레 이 조합... 추천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