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란바질파스타를 만들며 배우 유해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파스타는 참 관대한 음식이다. 어떠한 재료든 가리지 않고 품어주며, 심지어 그 재료들을 자기 이름 안에 넣어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토마토소스를 넣으면 토마토파스타, 빵속에 넣으면 빠네파스타, 새우와 로제소스를 쓰면 새우로제파스타가 된다. 심지어 이번에 내가 만든 파스타는 바질잎 대신 파질페스토를 넣었음에도 명란바질페스토라고 이름 붙이는 다소간의 뻔뻔함도 허용해 주니 이 얼마나 관대한 음식인가.
이름이 말해주듯 명란바질파스타에는 그야말로 명란과 바질페스토가 들어간다. 그 메인 재료들을 넣기 전에 올리브유에 페페론치노와 마늘을 볶아 향을 내고, 새우와 토마토, 양파를 넣어 더 볶다가 면수를 살짝 넣어 끓인 뒤 삶은 면과 바질페스토를 넣고 조리하다가 명란과 그라나파다노치즈를 뿌려 마무리하면 된다. 면은 재료를 볶기 전에 끓인 뒤 넓은 접시에 올리브유로 버무려놓았다. 글로 쓰면 살짝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어렵지 않은 음식이다.
음식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 억지로 무슨 생각을 하려는 게 아닌, 그냥 내 잠재의식에 숨어있던 어떤 주제가 머릿속에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은 억지로 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번에도 면에 바질페스토를 넣고 뒤적거리다가 문득 파스타란 음식이 참 너그럽고 관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내 의식의 흐름이 참 엉뚱하게도 유해진이란 배우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디에 누구와 있어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존재라는 점에서 파스타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유해진은 어떤 영화의 어떤 배역에도 완벽하게 녹아드는 사람이다. '부당거래'에서는 한없이 야비한 깡패였다가, '럭키'에서는 세상 순박한 청년이 되기도 한다. '택시운전사'에서는 겁도 많지만 대의 앞에서는 용기를 낼 줄 아는 택시기사였다가, '타짜'에서는 능글맞고 붙임성 좋은 노름꾼으로 변신한다. 심지어 '삼시세끼'라는 리얼 예능에서 스스럼없이 보여준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켜놓기도 했다. 이토록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대체 저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해왔던 것일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어떤 역할이 와도 거기에 스스로를 억지로 욱여넣는 것이 아닌, 그 역할을 자신에게 품으며 함께 녹아드는 그런 포용성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무언가를 품고 포용할 수 있는 관대함이 생기는 것 같다.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지금 무엇이 유행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파스타란 음식이 오랜 세월 사랑을 받으며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도, 유해진이란 배우가 무명 조연에서 명품 씬스틸러로 우뚝 선 것도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재료와 역할을 품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부턴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감에 살짝 괴로웠는데, 파스타를 볶으면서 스친 생각들을 정리하며 앞으로 살아갈 방향에 대해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고민들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저 음식을 하면서 스친 생각들이었지만, 이런 우연한 생각들이 한 번 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요리는 참 매력적인 행위가 아닌가 싶다. 작년 연말부터 살짝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괜히 정신없이 부대끼면서 요리 배우기를 살짝 멈췄더랬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그간 배운 것들을 연습해봐야 하는데 그조차도 소홀히 했으니 나도 참 게으른 사람이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가는 아예 요리라는 것에서 손을 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어 다시 학원을 찾았다.(예전에 등록해 놓은 수강권의 기한이 이미 지났음에도 흔쾌히 받아주는 선생님께 감사를...ㅠ) 이제 봄이 온 듯 하니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요리도 배우며 주방에 있는 시간들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