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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 Aug 29. 2022

문샤인과의 거리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요즘 반려 식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우울했는데,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친구는 식물 전도사라도 된 듯, 베란다에서 키우고 있는 식물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그 싱그러움을 한껏 자랑했다. 그리곤 헤어지기 전, 깜짝 선물이라며 내 손에 작은 화분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의 이름은 문샤인, 누구나 쉽게 키울 수 있어 인기가 좋은 식물이란다.      


예쁜 이름이었다. 나는 ‘문샤인’이란 이름을 곱씹으며, 두 손으로 화분을 꼭 쥐었다. 식물의 첫인상은 특별하지 않았다. 화사한 꽃도 피지 않았고, 탐스러운 열매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갈래의 기다란 잎줄기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색이 좀 오묘했다. 여느 식물처럼 파릇파릇하고 진한 초록색이 아니었다. 푸른빛 사이로 은은하게 은빛이 감돌았다. 그제야 왜 이런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신비한 달빛을 닮아서, 문샤인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렇게 나의 반려 식물이 된 문샤인은 내 방 창가에 살게 되었다. 역시 친구의 말이 맞았다. 덕분에 책상 앞이 한결 환해진 기분이었다. 삭막했던 도시의 풍경도 작은 식물을 함께 놓고 바라보니, 한층 생기가 돌았다. 공기 정화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내 마음도 조금씩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문샤인으로 달라진 내 방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곤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사진을 보내주었다. 친구는 앞으로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더 즐거울 거라며 뿌듯해 했다. 또한 정성을 쏟은 만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거라고도 말했다.     



문샤인을 만난 후 나는 바빠졌다. 그 작지만 싱싱한 생명체가 무탈 없이 잘 자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시로 문샤인이 놓인 창가에 다가갔다. 무언가 필요하거나 또 불편한 곳은 없는지 세심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어떤 날은 물을 마시다가도 갑자기 문샤인도 목이 마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물뿌리개를 들고 듬뿍 물을 주었다. 또 어떤 날은 창가에 햇빛이 들지 않는 것을 보고 화분을 베란다에 옮겨 놓기도 했다. 해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화분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움직였다. 매일매일 따뜻한 햇빛을 받아야 튼튼하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반려식물은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듯했다. 어느 날부터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잎줄기 하나가 노랗게 변하더니, 그 다음은 여러 개의 잎이 힘없이 축 쳐져버렸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계속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이 든 이파리에는 어느새 신비한 은빛이 사라지고 말라버린 잿빛만 남아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내 하소연을 한참 듣더니 친구는 식물 박사처럼 대답했다.      


“물을 너무 많이 준 거 아니야? 문샤인이 병드는 가장 큰 이유가 과습 때문이거든. 또 너무 센 직사광선은 잎을 타들어가게 해. 과유불급! 과한 애정은 위험하다고.”      


순간 미안해졌다. 내 딴에는 정성을 쏟는다고 했던 모든 행동이 알고 보니 반려 식물을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었다. 과습에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데도 계속 물을 부어주었고, 잎이 따가운데도 뜨거운 햇빛을 계속 비춰주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 자체가 문샤인에게는 괴로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지금까지 정성이라는 명목 하에 잘못된 애정을 쏟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친구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물주기를 당장 그만 두었다.  썩은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화분도 햇빛을 따라 옮겨 놓지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동안 해왔던 지나친 행동들을 모두 멈추는 것이었다.      


문샤인은 건조에 강하기 때문에 2~3주에 한 번만 물을 주어도 충분하단다. 실제로 한동안 물을 주지 않았더니, 식물은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더 이상 잎이 썩어 들어가지 않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매일매일 과한 애정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렇게 잘 자라주는 구나!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나는 계속 문샤인과 거리를 두기로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벌어졌던 참사를 또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과한 애정을 피하려던 나머지 아예 무관심해져 버린 것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혼자 잘 자라는 문샤인을 보면서 매일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어느새 그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책상에 앉아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갔더니 문샤인의 잎들이 온통 쭈글쭈글하게 변해 있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처럼 말이다. 당장 친구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엔 물을 너무 안줘서 그래. 문샤인은 물이 모자라 잎에 있는 수분까지 다 써버리면 주름이 생기거든. 관심 좀 가져달라는 표시랄까? 식물도 사람이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이젠 더 잘 키울 수 있겠지?”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과한 애정도 무관심도 모두 문샤인을 병들게 한 이유였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칼릴 지브란이 말했듯,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쏟는 것이 어떤 관계든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비결인 것 같다. 친구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곧장 문샤인에게 물을 흠뻑 주었다. 물 관리를 잘하고 정성을 기울이면, 문샤인의 주름진 잎이 다시 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너무 멀리 또 너무 가까이도 아닌 곳에서 애정을 쏟으려 한다. 문샤인이 다시 은은한 달빛처럼 빛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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