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책 - 정서적 지배(l'Emprise affective)
8년이 넘어 지난 셈이네, 벌써. 버스에서 내렸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량한 마을 가운데 선 것 같았다. 을씨년스럽게 흐린 날이었다. 산 입구까지 이어진 길 저 멀리 까마귀 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생시르라포피.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푸른 장미로구나’ 한 곳. 중세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느 해인가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기도 한 곳이다. 머리도 가슴도 터질 것 같던 한국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산을 오르고 그 높은 곳에 서자 산머리 위로 아침 햇살이 구름을 한 움큼 쥐어 열고 있었다. 쫓아 올라오는 큰 검은 개를 피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 숨을 고르고 앉았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뒤져 아는 기도문들을 하나, 둘 불러냈다. 우리나라 성당에서처럼 프랑스에도 주보 같은 게 놓여있는 걸 보았다. 펼치면 A3 정도 되는 크기의 인쇄물이었다. 철심이 박힌 가운데가 휘리릭 펼쳐졌다. 똬리를 튼 뱀에 붙잡힌 아이가 뱀에게 최면이 걸린 것 같은 그림 아래로 ‘위험’이라는 불어 ‘danger’가 붉은 글씨로 두드러져 있다.
‘위험. 정서적 지배는 가족, 친구, 직장 또는 애정 관계 속에도 존재할 수 있다. 관계가 감옥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
숙소로 돌아와 가져온 주보 기사를 침대 위에 펼쳐 놓고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오레스트는 오랫동안 불행했다. 왜냐하면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오레스트라는 사람은 쉰 살이 넘은 남자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정신분석가 사베리오 토마셀라다. 그에 의하면, 오레스트는 혼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외롭지만 자유로운 것보다 누군가에 의존하고 불행한 것을 선택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지배당했다. 이 사람은 정서적 지배를 받고 있다. 그가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혼자서도 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무엇보다 타인과의 관계로 자신을 정의하지 말아야 한다.’ 정서적 지배에 놓여있다는 걸 알아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서 이를 알 수 있는 열쇠로 여섯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 ‘이상화idéalisation’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왔다. 정서적 지배를 받는 사람은 도리어 그 관계가 아름답고 선하며 풍요롭다고 믿는다. 지배하고 있는 존재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똬리를 튼 뱀이 지배하는 사람이고 최면에 걸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아이가 오레스트처럼 지배를 당하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었나보다. 토마셀라는 ‘감옥에 갇힌 메두사’를 예로 든다. 메두사는 간수에게 의지해 자기 목숨이 그에게 달려있다고, 혹은 그가 없다면 자기가 사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을 정서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조금씩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자기보다 “열등하게” 생각할수록(직장 또는 사회에서 하급자라 여겨지는 사람들) 또는 어린이나 노인 등 실질적인 약자라면 먹이가 되기 쉽다.
생시르라포피 성당에서 알게 된 사베리오 토마셀라의 책『정서적 지배 l’Emprise affective』(2014)를 다 읽은 건 아마 삼사 년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다른 토마셀라 책 몇 권과 함께 틈틈이 읽었다. 책에는 정서적 지배로 불행했던 사람들 이야기와 영화 속 인물을 예로든 설명이 들어 있었다. 히치콕, 고다르, 비스콘티 등의 영화도 있었고 블랙스완, 브로크백마운틴, 킹스스피치도 있었고…, 하지만 잘 모르겠는 영화도 꽤 있어서 찾아지는 대로 하나씩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혹시 내가 공부도 일도 모두 그만두고 어디로 사라져서 뭘 하며 지냈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까 하여, 혹시나 있을까 하여 말씀드린다. 문득문득 이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고. 정해지지 않은 하루하루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머릿속을 정리해주던 것도 이 책이었다. 어느 순간인가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 『가스등』도 보고 설명하는 내용들을 보니 이 책에서 말하는 ‘정서적 지배’와 비슷한 심리 용어인 것 같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이 본인을 의심하도록 함으로써 상대방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말’로 2022년 미국 미리엄-웹스터 사전 선정 ‘올해의 단어’로 뽑혔다. 단어 검색량이 전년보다 1740%나 증가했기 때문이라 한다. 8년 전 나처럼 지금 갑갑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리라.
수영장에 갔었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정신없게 빠진다. 갑자기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말은 안 하지만 옆에서 샤워하는 아줌마도 불안한 눈치다. 나는 얼른 수영복을 입었다. 아니, 서두르다 보니 여기저기서 뭉치고 말려서 안간힘을 써도 제대로 입어지지 않았다. “아줌마, 수영복 입기 전에 뒤 머리카락 좀 어떻게 하고 들어가시죠.” 늘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영복을 못 입고 있으면 불쑥 손을 집어넣어 끌어 올려주는 사람도 있다. 친절하고 바지런한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정’이라고도 부르고 ‘오지랖’이라고도 부른다. 그래도 그렇지, 같은 어른으로 설마 잘 씻지도 않고 물에 들어갈까. 좀 오래 걸려서 그렇지, 내가 내 수영복도 못다 입을 할머니로 보이나. 나는 말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일단 옷은 입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당황했네요. 그 소리에 누군가 이야기해준다. 아, 그 소리, 옆 샤워 꼭지가 고장 나 나는 소리예요…. 참, 아침에 라디오를 듣는 게 아니었어. 아침부터 기자, 정치인, 정치평론가 등이 나와서 설전을 벌였다. 언제 적 듣던 말이냐, ‘주사파’니 ‘빨갱이’니. 있지도 없는 환상 같은 이야기를 놓고 싸우는 소리에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꼭 사이렌 소리였는데.
『정서적 지배』 책에도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뭔 소리야, 싶은 이해 못 할 말을 늘어놓던 그 정치인 같은 사람이 나온다. 존 에드가 후버, 토마셀라가 소개하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 「제이 에드가」 주인공이다. 영화 끝에 나오는 닉슨 대통령 추도사에 의하면, 존 에드가 후버는 ‘FBI 국장으로 48년을 일하며 FBI를 전 세계에서 최고의 법 집행 기관으로 키운’ 사람이다. 영화는 젊은 직원들을 불러 자신의 전기를 쓰게 하는 후버 국장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1919년부터 시작이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병’이고 볼셰비키 공산당원들은 모두 과격론자다. 엠마 골드먼 같은 이민자이면서 아나키스트, 인권 투쟁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한 엘리너 루즈벨트, 석탄 파업하는 노동자 등은 모두 폭도 또는 선동자, 공산주의자들이란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 노벨상(1964년)을 받는 것도 ‘불량배들과 과격분자들이 국제적으로 칭송받고 있다’며 1920년부터 그가 고수해온 기준을 들이대며 불쾌해한다. 후버 국장의 독백을 자막으로 번역된 그대로 옮겨 본다. “도덕이 무너지면 선한 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악한 자는 번창하는 법이지. 모든 시민에게는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미래는 비관적이다. 절대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요즘에도 미국을 겨냥한 조직들이 있다. 시민의 안녕과 행복을 파괴하고 이곳을 무법천지로 만들려는 자들 말이다.”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형 케네디를 도청한 내용으로 협박하면서도, 도청은 명령을 따른 것이고 장관과 대통령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자신은 나라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여긴다고 한다. 국민에겐 ‘저희는 여러분을 위한 기관입니다’라고 홍보하고, 도청을 승인받으면서는 이를 통해 나라를 구할 거라 장담한다. ‘정의’를 말하고 ‘헌신’을 말하면서 ‘대적 정보 활동’이라는 것도 서슴지 않는데 그는 말하길, “사실이 아닐수록 그 효과는 더 큰 법”이란다. - 그러니까 클린트 이스트후드 감독님, 후버는 어떤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가 수사했다는 엘리너 루스벨트, 케네디, 마틴 루터킹 등에 대한 의혹이 정말인가요. - 누군가 수사기법의 고도화를 위해 과학적 방법과 정보를 체계화한 공은 인정된다고 하니, “내가 칭송받는 건 당연하잖아.”라고 호언 하는 에드가. “나라를 볼셰비키 침입으로부터 구하고 과격분자들도 없앴으며….” 그의 머릿속은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시작하고 두 시간을 귀에 못이 앉도록 들은 후버의 영웅적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영화 마지막, 후버 넘버 투맨이며 그의 동성애 대상이기도 했던 클라이드 톨슨이라는 인물이 하는 말로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꾹 참아왔던 숨을 뱉고 영화를 되돌려 확인하느라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다급해진다. 토마셀라는 이 영화의 주인공 「제이 에드가」가 정서적 지배 관계 속에 살았다고 본다.
‘정서적 지배는 정신을 죽이는 것이다. 삶, 세상, 인간, 관계에 대한 거짓말을 양분으로 하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기획한 착각이며 교묘하게 조직하는 기만이다.’
톨슨이 후버에게 “모두 거짓말”이라 하자 후버는 톨슨에게 말한다. “자네를 고용하는 게 아니었어. 그거 알아? 자격도 미달이었지. … 네가 필요했고 … 평생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어 … 아무도 못 믿겠어 … 너에게만 의지하고 있다고 ….”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던 톨슨과 달리 후버는 그에게 ‘네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돌아서 층계를 올라가며 뜬금없는 독백이 이어진다. ‘우리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개인이 소중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삶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초월하는 의미를 가졌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며 증오나 부자연스러운 인간이 만들어낸 경계보다 더 영속적이다.’
말 자체에 대해선 반박할 수가 없다. 그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데 어쩌랴. 그래서 그를 악하게 보질 못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착각과 기만, 거짓말 위에 있는 거라면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짐이 곧 국가다’하는 절대군주보다도 더한 망상이랄까. 자기가 ‘민주주의의 본질’이고 ‘삶’이고 ‘사랑’이다. 그런 ‘민주주의의 본질’, ‘삶’, ‘사랑’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초월해 있다. ‘인간’이라는 주어에 자기 자신은 빠져 있다. 그 번듯한 말속에 숨어 있는 경멸과 증오를 알아채야 한다. 토마셀라는 이것을 ‘광기’라고, 힘을 과시하던 독재자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정서적 지배관계를 후버와 후버 어머니의 관계에서도 찾아낸다. 모든 걸 챙겨 주는 어머니를 에드가 후버는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따른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처럼 되면 안 된다고 반복해 말한다. “마샤 부인이 오늘 아침에 계시를 받았다는구나. 나더러 드레스를 사라고 했어. 네 아버지가 곧 죽을 거라더라. 그러면 네가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가 될 거야. 네 형도 좋은 사람이지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바로 너란다.” 또, 그가 여자들하고 춤추기 싫다고, 창피하다고 하자 어머니는, 어릴 적 여장하다 놀림을 받고 수치심에 권총 자살한 친구 이야기를 하며, “내 아들이 그런 증상이 없는 걸 내가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데 … 그런 아들을 갖느니 차라리 죽은 아들이 더 나아.”라 말한다. 토마셀라는 후버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랑’으로 위장한 ‘증오’를 물려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부모나 배우자들은 이들을 이용하고 이들을 통한 성공을 꿈꾼다. 분별없이 이를 유산으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정상”을 가장해 증오라는 유산을 물려주게 되기 때문이다.’
‘구글 트렌드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을 부제로 달고 있는 책『모두 거짓말을 한다』 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믿지 말고 행동하는 것을 믿어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더 낫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친구에게, 설문조사에,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 세상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완전한 데이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말만 번지르하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사람들은 말이 그럴듯하다고 그대로 믿고, 그러지 않는다. 하지만 ‘광고를 가장 많이 하는 제품이 매출이 가장 높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듯, 노출 빈도가 높으면 진짜인 것으로, 좋은 것으로, 타당한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어떤 진영이든지, 젊어서든 늙어서든, 요즘은 모두 한결같이 화가 나 있다. ‘성난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면 오히려 분노가 커질 수 있다’고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말한다. 난 그냥 아줌만데, 평범한 주부인데, 이 와중에 화내지 않고 뭘 어떻게 해야 좀 창의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멸’과 ‘증오’를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