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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23. 2023

내가 그림이 되다

어느 날 내 책 - 내가 그림이되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껴,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이다. 
(『예술은 어떻게 거짓이자 진실인가?』, 조경진, 사람의 무늬, 2016. 75쪽. )


    “엄마는  못 볼 영화야.”     

    영화 「오징어 게임」이 삽시간에 유행할 때 아들내미가 리모콘을 손에 들고 우리도 보자면서 하는 말이다. 어떻길래 엄마가 보지 못할 영화냐 물으니, 보면 안 단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투덜댔지만 아빠까지 뭔데, 합류하면서 다 같이 보게 되었다(어머니는 주무시고). 나는 탕, 탕,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화들짝해댔고 선혈이 얼굴로 어디로 튈 때마다 어찌할 바 모르고 눈 가리기 바빴다. 보긴 보는데 에너지 소모가 정말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이런 영화를 왜 같이 보자는 거냐 따져 물으니, 엄마가 옆에서 그렇게 봐줘야 더 실감 나고 재밌단다. 어머 그런데 그게 왜 엄마가 못 볼 영화니, 이래 봬도 엄마 초현실주의 공부한 여자야, 너, 베이컨 그림 봤어, 정육점 고기처럼 사람이 막 잘리고 뒤틀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나 아들이나 영화 보기 바쁘고, 어느새 나도 아, 왜 지금 끝나, 얼른얼른 다음 편, 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학 전공인 내겐 초현실주의가 뭔가하고 이것저것 기웃하던 시절이 있다. 초현실주의자 루이 브뉘엘이 감독하고 살바도르 달리가 함께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여자 눈을 면도칼로 가로 자르는 장면이 나온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퍼포먼스 같은 거다. 눈을 새까맣게 칠해 자화상을 그린 화가 에바리스토의 그림을 보고 나는 눈물 흘린 적도 있다. 그의 이 검은 눈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들과 달리 오징어 게임 세트장은 화장품 가게처럼,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파스텔색으로 예쁘고 순진한 놀이로 가득했다. 클림트가 황금색으로 장식해 화려하게 그린 유디트 그림 같았달까. 홀로페르네스 목을 잘라 들고 관능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유디트 말이다. 나는 관능이고 순진이고 뭐고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에 더 끌린다. 이 그림 속 유디트는 소매를 위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칼로 머리를 자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클림트처럼 황금 칠을 해주고 퇴폐미라도 예쁘게 보여야 사람들이 바라보기 편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 혼자서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무서운 여자다”, 이탈리아의 한 미술 평론가는 젠틸레스키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클림트 그림엔 팜므 파탈의 유혹, 승리감 같은 게 보이고, 한번 해보자는 거니 뭐니, 그런 느낌이 드는데, 젠틸레스키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림 속 여자들이, 이봐요, 눈만 멀뚱멀뚱 그러고 가만히 있을 거야, 어서 와 잡아주지 못해, 그러는 것 같다. 나는, 에구 난 못 봐, 애들이 보고 배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하는 그런 아줌마가 아니다. 나는 이런 그림도, 영화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볼 수 있는 여자다. 

    그런 나지만…, 나는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셀카도 잘 찍지 않는다. 거울 속에 내가, 더욱이 청춘을 지나버린 내 모습을 보는 게, 참 불편해서다. 나이 들어도 멋있는 그런 인물도 아니고 앞집 엄마는, 더군다나 칠순이 넘은 우리 엄마도 예쁜데, 나는…, 그러면서 내가 나를 잘 쳐다보지 못한다. 눈곱은 잘 뗐나, 수염이 너무 자라지 않았나, 코털은 안 삐져나왔나, 이에는 뭐 낀 거 아닌지 보려면 모를까. 세수하려고 거울 가까이 얼굴을 붙여 눈썹을 정리한다. 그러다 문득, 근데 왜 브뉘엘은 자기 눈을 안 썰고 엄한 여자 눈을 써는 거냐, 의문이 든다. 애플 드라마 「Dr 브레인」처럼 사람 머릿속 생각이 궁금했던 거냐. 

    다시 젠텔레스키가 떠올랐다. 붓을 들고 남자 얼굴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회화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이다.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에서 이 그림에 대해 말한다. ‘카메라 렌즈를 거즈로 덮은 듯한 표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그림이 사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의 작품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사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말을 읽고서 나는, 작은 거울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보고 싶었다. 불가능했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나밖에 볼 수 없었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시도는 해보자고 셀카봉에 휴대폰을 세워 놓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찍어 보려고 했다. 휴대폰은 내가 거울 속에 만들어 놓고 보고 있는 그대로 찍지 못했다. 휴대폰 카메라 렌즈 각도가 나랑 달랐기 때문이다. 내 수준에선 카메라렌즈를 내 눈높이와 비슷하게 맞추고 찍는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카메라가 받아 찍는다. 나는 거울도 바라보지 않고, 핸드폰도 보지 않고 책을 보거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가 아닌 시선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으려나. 결과물은…, 놀라웠다. 심통 난 아줌마 같기도 하고(책, 배신이다), 남동생 살쪘을 때 모습이 보이네. 그래, 직시하자. 그 험한 꼴도 잘 보면서 내 꼴이 뭐 어떻다고 못 보고 그러냐, 싶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더 남동생 같았지만 뭐, 평생 남자들이 부러웠잖아. 다른 사진 다 지우고 눈에 너무나 낯설기만 한 내 얼굴 사진을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앱으로 불러 그 위에 대고 선을 그렸다. 살 좀 빼야겠네. 아직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이고 싶지 않아 저항하다 보니 선 몇 가닥 없는 그림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 막 내 눈을 바라보기 시작한 내가 저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림이 되었다. 내가 남의 그림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치고, 내 그림이 되는 게 이렇게 쉬웠어? 이것이 나인가 싶긴 하다. 얼핏 무언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이것 빼고 나머지 모두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초점 렌즈 때문인가…. 좀 물어봐야겠다 싶어 ‘누구게?’하고 카톡에 올렸더니 대번에 나라고 알아보는 엄마와 여동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내 그림처럼 나의 글이 되는 엄마는 내 글에 비친 엄마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남의 그림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물어봐야 조금 알아 질 텐데, 그들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힘들다. 그린 사람에 의해 왜곡되거나 아예 배제되기 일쑤다. 위대한 화가 피카소, 그는 여러 여성과 사귀고 그 여인들을 ‘뮤즈’, ‘영감’, ‘연인’, ‘사랑’이라 부르며 그림으로 남겼다. 동시에 그는 교제하던 여성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학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자는 고통받는 기계”라고도 했다. 피카소 그림 「우는 여인」에서 볼 수 있는 눈물, 훌쩍임, 등은 모두 피카소가 그렇게 만들고 보고 들은 것이다. 모델이었던 도라 마르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얼굴을 그리다』, 정중원, 민음사, 2020, 158-163쪽. 「피카소의 폭력」)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알고리즘의 소개로 누군가의 그림이 된 사람들 반응을 볼 수 있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창조자 피카소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데본 로드리게스(Devon Rodriguez)라는 젊은 화가(26세)가 뉴욕 지하철에서 앞에 앉은 사람을 그려서 “제가 당신을 그렸어요”라며 그림을 보여주면 이를 받아 본 사람이 자신을 그린 그림을 보는 반응을 담은 것이다. 감동적이면서 신기한 영상이었다. 지하철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낯선 사람이 대상이 되고, 대상은 그리는 사람과 무관하게 완전히 자기 세계에서 자기 생각과 움직임에 빠져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즉각 그림의 대상 앞에 전시되는 셈이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과의 소통이 순식간에 일어나면서 이 모든 과정이 그림과는 또 다른 작품이 되어 미디어를 통해 시청자와 만난다. 화가는 “당신 개가 예뻐서 그렸어요.”,“당신 재킷이 인상적이어서….”,“당신 모자가 멋있어서….”,“당신 문신이 아름다워서…”,“어머니 날 축하합니다.”,“국가를 위해 봉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 그가 대상을 보고 발견한 걸 따뜻한 말과 함께 전하고 있다. 그림을 받은 사람들은 뜻밖의 선물에 놀라며 기뻐한다. 어떤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뉴욕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 평범해 보이면서도 특별한 모습도 신기하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 모두가 감동할 만큼, 화가의 실력도 놀랍고 대단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에게 “감사해요”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모습은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림을 그려 건네는 화가의 용기가 없었다면 낯설고 스쳐 지났을 사람들이었다. 깍쟁이 같은 할머니겠군, 애 엄마 피곤해 보이네, 온몸에 문신, 덩치 큰 흑인, 무서워,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눈에 띄는 건, 그림을 받아 들면 감동해 일어나면서 쓰고 있던 마스크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벗는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자기 이름을 말해준다. 화가 데본은 마스크를 벗으며 다가오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악수하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 자가격리, 거리 두기로 고립된 시기 데본이 만든 틱톡 영상이 천만 이상 조회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 작가가 그걸 팔아서 수익을 내기 마련인데 지하철 승객들은 오히려 ‘자기’를 그린 그림을 선물로 받아 소유한다. 돈은 영상 조회수가 만들어주니, 그림을 그리는 주체, 그려진 대상 너, 나 할 것 없이 감동이 배가되고 그 크기가 클수록 수익이 높아져서 이 효과가 다시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예술적이다. 아니 예술이다. 나는 동영상을 보고 감탄하다가 곧 심각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애써 그리고 쓴다지만, 부족하기만 한 실력에 늘 좌절하곤 했다. 잘못해 엄마를 곤란하게 하면 어쩌지. 남한테 자기 얘기는 하는 거 아니라고들 하잖아. 그래도 뉴욕 지하철에서 초상화가 데본이 그려주는 그림을 받고 사생활 침해네, 누구 허락받고 그리는 거냐, 따지고 기분 나빠 하는 사람 없었다잖아…. 

    그러다가 수잔 발라동이라는 한 프랑스 화가를 만났다. 화가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렉 등 그림의 모델이다가 화가가 된 여성이며, 음악가 에릭 사티의 연인이었고, 화가 위트릴로의 어머니였다. 나이 쉰이 훨씬 넘어 그렸다는 「푸른 방」이라는 그림 속 펑퍼짐한 인물이 정이 가고 귀여워 그녀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빌려 읽었다. 그리고 다시 서가에 꽂아 넣던 중이었다. 예술 주제 책을 죽 둘러보는데, 『내가, 그림이 되다 :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2013.)란 책이 인디고 색 표지가 닳아서 금방 찢어질 듯 위태해 보였다. 표지를 보강해 주어야겠군, 생각이 들어 집어 들고 와 읽기 시작했다. 책날개에는 ‘초상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자신이 미술 작품으로 변모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소개되어 있다. 구글도 아닌데, 이건 무슨 알고리즘일까? 책이 나를 부른 셈이다. 마틴 게이퍼드라는 미술 평론가가 루시안 프로이드 그림 「파란 스카프를 맨 남자」의 모델을 하며,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7개월 동안 함께한 이야기를 쓴 책이었다. 마틴은 프로이드가, ‘창조적이라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 …’‘항상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재능이 없었습니다’ 같은 진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우울해져서 바로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고 얘기해준다(131쪽). 그래, 내가 궁금한 것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것들이 아니지. 말도 해보기 전에 지례 겁먹어 버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두려워하지 말고 움츠리지 말자.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는 이제니의 시(「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20 42쪽)에서처럼 그렇게. 

    마틴에 의하면 ‘모델을 서는 것’은 ‘모델의 피부와 근육, 살 그리고(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자아와 관련된 일이다’. 내게 반복되는 질문 역시 이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모델을 서고 내린 결론은 이렇다. ‘초상화는 양방향 행위’라는 것이다. 모델과 화가는 서로 소통해야 하고 그래서, 진지한 것이든 별 볼 일 없는 것이든 ‘모델이 지루함의 늪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든, 대화가 중요하다그리는 이와 그려지는 이가 서로가 서로에게서 를 찾게 되는 과정이랄까.  

   

    ‘프로이드가 나를 관찰함으로써 나의 행동은 달라진다.’(21쪽)     


    엄마를 보면서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늘 엄마 반응이 궁금하다. 얼굴 움직임, 눈짓, 표정을 유심히 본다. 엄마는 온화한 표정을 한 아줌마다. 세상에서 내 얘기를 가장 오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엄마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 나면 바로 읽어 드린다. 어떠냐고 묻는다. 엄마는 좋다, 싫다 의견이 없다. 그냥, 잘 썼다, 한다. 정중원이 『얼굴을 그리다』에서, 자기 할머니에게 그림을 그려드리니 잘 그렸다, 고맙다, 하셨는데 뒤에 보니, 주름이며 그런 것들이 보기 싫었다, 하셨더라는데, 엄마도 그런 건 아닌지 늘 걱정이다. 마틴도 ‘화가는 그림이 가능한 한 힘 있고 흥미로워지기를’ 원하고 모델 역시 그것을 원하지만 ‘그림 속에서 자신이 좋게 보이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 글을 여동생에게 읽어주니 가만 듣다가 “언니, 나는 언니가 아빠를 그렇게 쓴 거 맘에 안 들어. 아빠는 말야….” “알아, 알아. 하지만, 내가 아빠 위인전을 쓰는 건 아니잖아.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빠에 대한 기억 일부일 뿐이라고.”      


    ‘개인의 지속적인 정체성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결합, 즉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지만 다른 것들보다 그저 조금 더 강한 것일 뿐인 기억과 특징의 결합일 뿐이다.’ (41쪽)     


    엄마는 잊을 만하면 뜬금없이 “네가 그렇게 쓴 걸 보고서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 전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라고 한다. 대놓고 어디라고 말은 안 하지만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곳을 더 얘기하기도 한다. 이모가 했다는 “언니, 우리도 힘들었어.”라는 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엄마도 나의 기분을 살피는 게 틀림없다. 전주로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다. 우리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가 좀 무례하게 굴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이래 보여도 이런 꼴 저런 꼴 다 겪은 사람인데 말이야.” 하며 칠순 중반 할머니 같지 않게 일부러 신나게 흔들고 노래하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원래도 먹는 데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이지만 그날은 더 쿵짝이 맞아 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그날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초상화의 역설은 이 끊임없는 다양성으로, 대상이 항상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다. 살이 있는 존재는 생리적, 심리적으로 항상 끊임없이 변한다. 기분은 변하고 활기는 상승, 하강하며 신체도 서서히 늙는다.’(73쪽)     


    프로이드의 모델로서 글을 쓰는 마틴은 말한다.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가 나를 묘사한 것만큼이나 프로이드를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으로 가득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기록은 일종의 나의 자화상’이라고, ‘책을 쓰는 것도 … 체력의 문제이자 … 프로이드가 ‘의욕’이라고 즐겨 말하는 것, 즉 지속해나가는 데 필요한 확신의 문제’라고. 

    그림이나 글이나 같은가보다. 에셔의 그림 「손을 그리는 손」이 떠오른다. 오른손이 연필을 쥐고 왼손을 그리고 있다. 이를 따라가 보면 결국 그 왼손이 오른손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엄마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 중에 엄마는 내 이야기가 되고 있다. 글 속에 책들도 마찬가지다. 얘기하다 책을 만나고, 읽다 보니 그 책을 얘기하게 되고 얘기하다 엄마를 만나고 나를 만나고 또 책을 만나고…, 끝도 없이 돌고 돈다.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다고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늘 “서두르지 마. 가다 보면 닿게 돼 있어. 안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한다. 마음이 급해지려 하면 나는, 엄마 말을 되뇌곤 한다. 내게 글이 되어 주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기도 하다. 그림의 모델인 마틴 게이퍼드에게 서두름이 없는 프로이드와 작업이 ‘마음을 느긋하게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는 치료 효과’(117쪽)가 있었다고 하니, ‘서두르지 않는 것’은 내가 이 글을 쓰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할 덕목일 듯하다.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는 만남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이미지에는 시간과 스쳐 지나갔던 느낌과 분위기 등 여러 요소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이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그저 조용히 함께 머물렀던 그 모든 시간의 기록이다.’ (219쪽)     


    처음으로 그림의 모델이 된 마틴 게이퍼드는 프로이드가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받아들이기로 한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꼭 같은 작가의 진실한 태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초상화가 사람들을 닮은 초상화가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초상화이기를 바랍니다. 모델과 닮은 것이 아니라 그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112쪽)     


    단순하고 서툰 내 글이 되어 준 엄마도 한없이 투박한 내 얘기들을 엄마를 그린 글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글’로 받아들여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도서관 서가에 꽂힐 이 책을 그저 저 멀리서 잊지 않고 찾아온 별빛을 보듯 봐주시길. 딸은 엄마가 그렇게 믿어주리라 믿고 있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토스카나」라는 영화를 보았다. 소박한 돌상이 하나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운 것이라 했다. 영화의 끝에서 그 석상이, 셰프가 된 주인공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요리를 배우며 수없이 반복해 쓰고 버린 달걀 껍데기를 채워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그 발밑에는 ‘딱 남들만큼 특별하다’고 씌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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