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서사 비판
여성 서사를 즐기다 보면 때로는 과거의 내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좋아했었는지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성 서사가 별로 없다는 문제 의식을 갖거나 여성 서사의 매력을 알기도 전, 우리가 좋아했던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영화, 애니메이션, 예능, 드라마 등 여러 장르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남성 중심 서사를 되짚어보자.
어릴 적 드라마를 별로 즐기지 않았지만, <파스타>는 무척 좋아했었다. 작품 특유의 감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여성주의을 접한 후에 다시 본 적이 있는데, 남주의 무례함과 폭력성이 도를 지나친 수준이라 깜짝 놀랐다. 가장 유명한 대사는 잘 나가는 셰프인 남주가 외치는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 셰프인 옛 연인에게 상처받은 후로 모든 여성에게 분노와 실망감을 돌리며 여성인 모든 셰프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서브남주 역시 만만치 않다. 능청스러운 매력을 뽐내기 위한 대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외국에서는 식사 후에 요리사를 불러서 당신의 요리가 섹스보다 낫다는 말도 하고 그래.” 중요한 것은 서브남주가 주인공인 서유경이 주방 보조로 일하는 레스토랑 라스페라의 사장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직장 상사가 저런 말을 건네는 건 절대로 농담이 될 수 없는 폭력이다. 도대체 이렇게 무례하고 폭력적인 아저씨들에게 어떻게 설렘을 느낄 수가 있었던 걸까? 그 이후로도 중년미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아저씨들을 착즙했으니, 어릴 적 당한 세뇌가 참 무섭다.
히어로물을 보며 정의감을 키우던 나에게 마블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하지만 여성주의를 접한 후의 내가 마블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알탕’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구해내는 서사를 지닌 히어로물의 영웅은 보통 남성이었다. 남성 영웅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여성은 얼마든지 희생되고 대상화되어도 좋다고 여겨진다. 이는 히어로물의 대표주자인 마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블의 대표적인 영웅 중 한명인 나타샤 로마노프, 바로 블랙위도우는 기술, 약물, 초인적인 힘을 빌린 남성 영웅들과는 달리 그저 스스로의 뛰어난 지성과 전투능력으로 최고의 쉴드 요원이자 어벤져스가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지닌 나타샤도 <아이언맨2> 에서는 ‘매력적인’ 비서역할로 등장하고, <어벤져스2>에서는 뜬금없이 헐크와 연인 관계로 다뤄지며, <캡틴아메리카:윈터솔저> 에서는 캡틴과 불필요한 스킨십을 나눈다. 남성 영웅들과 불안정한 관계를 형성하나 그의 본연의 서사는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엄연히 어벤져스 원년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나타샤는 이제서야 첫 솔로무비가 나온다. 그의 입지가 좁다고 느껴지는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닌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에 여성은 없다.
TV를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즐겁게 볼 수가 없다. 남성출연자가 우르르 나와 그들만의 서사를 그려내는 뻔한 레퍼토리에 질려버렸다. 여장을 벌칙으로 내세워 우스꽝스러운 화장과 착장을 하고 수치스러워 하는 모습과 젊고 예쁜 여성을 데려다 이런저런 무례한 질문을 유머로 내세우는 태도. 남성들을 지적이고 부유한 캐릭터로 내세우면서 여성의 가치는 그저 외모 하나로 매겨지는 모습. 방송 프로그램의 변치않는 클리셰이다. 새로운 예능이 나온대도 남성출연진은 ‘어디서 많이 보던 아저씨들’인데 여성은 그 자리에 없거나 아니면 게스트로 젊고 예쁜 여성을 데려왔다가 내보낸다. 매번 바뀌는 그들에게 기껏 한다는 말은 ‘애교 한 번 보여주세요’.
가뭄에 콩 나듯 여성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여성의 역할이 한정되어있는 것은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내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TV 보는 게 재미없어진 줄만 알았다. 착각이었다. 나는 그저 남성중심의 알탕 예능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성중심 알탕예능에 질려 TV를 멀리한지 한참 된 요즘,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성연대가 드러나는 프로그램이 꽤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를 보고있으니 언젠가 TV를 켜도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