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 다른 세상
그러니까, 오늘이 2024년 하고도 9월 26일.
며칠만 더 살아남으면 곧 2025년이 된다는 소리.
"원더키디"의 배경도 2020년이었고, "백투더퓨처"의 배경은 2015년인데, 2024년이기만 해도 상당히 "미래적" 아닌가? AI가 글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긴 글 요약도 자동으로 해주는 세상 맞는데.
그런데, 여기 파키스탄은 좀 그게 아닌 것 같다.
오늘 서류검토용 연필이 필요해서 사무용품 보관함에 가서 몇 자루를 집어와서 깎아 쓰려는데, 뭐가 좀 이상하다. 이거, 글을 연필심으로 쓰라는건가, 나무끝으로 쓰라는건가.
혹시 얘만 그런가? 같이 가져온 다른 연필을 봤더니.
헉. 한눈에 봐도 뭐 정상인게 없다. 아니 저걸 돈받고 판단 말야?
전부 다 그런 건 아닌데, Made in Pakistan의 공산품 품질은 조악하기로 유명하다.
(수공으로 만드는 카페트나 가죽신, 꿀이나 암염 등 품질 좋은 특산물이 있긴 하지만, 하나같이 "공산품"은 아니다.)
정말 정말 대부분의 공산품이 질이 정말 떨어진다.
연필심은 가운데 안 가 있고, 나무는 거칠고 갈라지며, 볼펜은 쓰다말고 고무가 찐득찐득 녹아붙고(여름이 좀 덥긴 하지만서도), 주방 스텐조리기구는 마감처리가 거칠어서 손베기 딱 좋다. 대체 다들 포기하고 사는건지 QC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건지 원가와 맞추려면 그렇게밖에 안 되는건지 알 수가 없지만 흑흑 돈주고 쓰레기 사는 느낌이 자주 든다.
수입되는 물품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전 세계 물품 중 다른 곳에선 팔아먹을 수 없는 최저가 저품질 물건만 들어오는 것 같다.
랩탑PC 소리가 너무 작아서 중국산 소형 스피커 하나를 마트에서 샀다. 박스 패키지도 한 10년은 된 거 같지만 소리만 나오면 되니까 그냥 업어왔는데 열어서 꽂아도 소리가 안 나온다. 케이블을 유심히 봤더니 아예 대 놓고 단선. 저렇게 하나만 자르기도 힘들겠다. 어떻게 저렇게 잘린 케이블이 새 박스에 들어가 있는거지?
한국에도 저가물품의 상당수는 중국산 또는 동남아산이 많긴 하지만, 최소한의 품질관리는 된 제품들이 들어오니까 저렇게 터무니없는 제품들은 알아서 걸러지는데, 여긴 당최 품질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다.
마감 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기능만 제대로 하면", 어지간히 맞춰서 써줄 마음이 있다. 있는게 어디야. 여긴 살기 힘든 파키스탄이니까 이해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연필이라면 심은 가운데 넣어주고, 스피커 팔면 소리가 나오는 거 팔고, 주방 스텐기구는 튀어나온 철사나 이바리 정도는 자르고 난 다음에 팔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뭐, 우리도 1980년대 90년대 비슷하긴 했지.
품질이 좀 떨어져도 수입품은 꽁꽁꽁 묶고 관세 때리고 국산품의 경쟁력이 잡힐 때까지 정부가 무조건 질 떨어지는 국산품만 강요하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일본 여행 가면 코끼리표 밥솥이나 아이와 미니카세트만 잘 업어와서 재판매해도 쏠쏠히 용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말랑말랑 촉감좋고 너무 잘 지워지던 잠자리표 일본산 지우개가 참 좋았지만, 수입 학용품은 학교에 가져갈 수조차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 국산품들 품질이 수입산 대비 좀 열악하긴 했지. 그래도 그게 다 애국이다 생각하고 참고 살았다.
파키스탄 살면 정말 거의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의 30~40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기약없는 행정처리는 물론 여전히 패스트 머니를 공공연히 밝히는 공무원도 많고, 뒷배와 알음알음이 먼저 통하는 사회. 물건들의 품질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하고(안 좋은 쪽으로), 거리에는 쓰레기가 엉망에 한숨 나오는 도로 사정에, 정전이 안 되는 날이 없는 전력사정에, 수돗물 같은 거 없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관정수에 의존하는 현실에...
그래도 이 나라가 끼역끼역 굴러가는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강력한 하나의 종교 공동체로 엮여 있다는 것과 여전히 인구가 증가하며 젊은층이 많은 생산 잠재력이 있는 나라라는 거. 대한민국 국토 면적의 8배가 넘고 인구는 2억이 넘으니 결코 무시할 나라는 아니긴 하다. 독립 초반부터 국방력에 올인한 나라라 의외로 군대는 강성하며 심지어 핵무장 국가이기도 하다.
암튼 세계에서 행정속도 가장 빠르고 가장 살기 편리하다는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오다가 파키스탄 방식으로 살아가자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래도 어떡하나. 사람 사는 곳인데 다 맞춰서 살아야지.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팔리는 삐딱한 심 박힌 연필이 2024년 파키스탄 현주소를 대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푸념 섞인 글을 늘어놓아 봅니다. 이 나라도 발전하게 될 날이 오겠지요. 언젠가는.
그런데 이 나라에서 당장 살아가려면, 많은 걸 내려놓고 살아야해요... 너무 기대하면 곤란해요.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