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1_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나에게 봄은 누군가를 항상 돌보는 시간이었다. 그게 나 자신이건, 학생들이건. 학창 시절에는 새 학기의 긴장과 설렘을 앞둔 채 준비하고 나 자신을 돌봤다면, 교직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항상 학생들을 돌보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 같다. 봄이 봄인지도 모른 채. 2월부터 수업과 평가를 준비하고, 개학 전 학교에 나가 새 교실과 교무실을 정리하고, 학생들 이름을 외우고, 학급의 평화로우면서도 질서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고민하고..
그러다 보면 이미 만천하에 만개한 봄꽃들이 이미 절정에 닿아 좀만 늦으면 놓치는 시기가 되었고, 지고 나서야 그 거리들을 걸을 새라 맘 바쁘게 봄꽃들을 구경하려 다니며 봄이 왔음을 조금은 늦게 자각하고, 짧게나마 누리곤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맞이한 휴직. 아마도 은퇴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유가 넘치는 시기. 근 10년간 아니 대학시절부터 돌아봐도 심심했던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채로 맞이한 시간은 꽤나 근사하다. 오랜만에 다시 학생 시절처럼 타인들보다는 나 자신을 돌보는 데 집중한다. 학생 시절과 달라진 점은 나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게 된 것?
요리, 베이킹, 일본어... 배우고 싶지만 미루기만 했던 것들을 배우고, 읽고 싶던 책들을 와장창 몰아 읽기도 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변덕스런 봄날씨와 점점 무르익는 봄풍경을 몸소 느끼러 나가고, 냉이와 달래, 봄동 같은 제철재료를 난생처음 내 손으로 직접 다듬고 제철음식을 해 먹으며 뿌듯해하고, 남편의 밥을 챙겨주고, 따뜻한 차 한 잔과 가만히 앉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기도 하고, 엄마아빠와 급하지 않은 시간을, 오랜만에 밀리지 않은 온전한 우선순위를 드린 시간을 보낸다.
지금까지 반쪽짜리 인생을 살았나 싶을 정도로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을 느끼고, 처음 해보는 생각들을 한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를 돌보는 것이구나, 부모님과 급하지 않게 보내는 시간은 옛날 얘기를 하든 그냥 같이 밥을 먹든 그 자체로 내 마음 어딘가가 채워지는 시간이구나, 부모님이 제일 원하는 건 그냥 나와의 시간이구나, 끝이 뭉툭해진 연필로 꾹꾹 힘을 줘가며 뭔가를 사각사각 쓰는 것도 매력이 있듯 느려도, 천천히 해도, fancy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서두르지 않고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건 그 과정 자체도 즐거운 거였구나, 지금까지의 나는 여유를 누릴 줄 몰랐구나...
그렇다고 일이든 공부든 눈앞에 주어진 task를 해내고, 추가로 더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밖에 나가 놀고, 쉬고의 바쁜 쳇바퀴를 돌던 지금까지의 젊은 날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나를 너무 갈아 넣을 필요는 없었구나, 뭐든 목숨 걸 필요는 없다, 인생이나 사회는 네모바퀴 굴러가듯 주먹구구든 부조리든 어떻게든 굴러가는구나 등의 생각도 들지만. 치열하게, 부산스레 보냈던 봄날이 있으니 여유롭고 꼭꼭 씹어 음미하는 봄날을 맞이할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자’라는 가훈에 충실했던 20대와 30대 초반을 기쁘게, 예쁘게 액자에 넣어주고 나는 다음으로 가자. 좀 더 여유 있고, 나 자신과 가족을 기쁘게 돌보고, 계절을 느끼고, 많은 일들을 더더욱 쉬이 툭툭 털고 웃어넘길 수 있는 30대 중반으로 가자.
이번 봄이 나에게 알려준 건 이미 충분하니, 남은 봄날은 누리고 만끽하자. 하루에 좋았던 일 하나 있으면 그것 자체로 충분함을 알고 자족하며, 더 자주 웃고 일상의 평화에 감사하며. 변덕스런 인생의 날씨에도 마음에 핀 꽃 몇 송이에 위로받으며. 내 주변의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고 더욱 소중히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