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0415_낯선 일을 시작했을 때의 계기

by 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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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일들은 잃을 게 없을 때 찾아왔다. 손에 쥐고 있는 게 없어서, 잃을까 봐 전전긍긍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때.


아직도 인생에서 제일 그리운 시절인 미국을 가게 된 것도 처했던 현재가 더 답답해서 미쳐버릴 거 같으니까. 돌아와서 임고는 어떡할래, 휴학이 흔치 않았던 사대에서 나 혼자. 한 학기 동안 학원, 과외, 서빙까지 동시에 세 가지 알바를 하고, 그게 너무 힘들어서 교회 가서 울며 기도하더라도, 중간에 포기하기에는 돌파구가 너무 필요했다. 그렇게 힘들게 미국에 갔는데 가자마자 나 혼자 아프고, 아직 친해지기 전인 사람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무력하고 절망스러웠으나 그 덕에 내 삶 속에 숨통이 트이는 새로운 골목을 만들어준 의사 선생님도 만나고, 천사 같은 마음씨의 동료들도 얻게 되었다. 밑바닥을 치고 내 마음이 이미 벌거벗어있었기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조건보다는 나를 모난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진실한 남자를 알아보는 눈도 생겼다.


지금까지도 보고 싶고, 거의 유일무이한 롤모델 같은 큰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양질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 보니 같은 맥락이구나.




나는 항상 내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미련한 것 같다. 몸이 아프기 전엔 쉴 줄을 모르고, 마음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는 포기할 줄을 모른다. 진심은 통한다고, 노력하면 될 거라고. 30년 가까이 그렇게 믿고 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인생에 좋은 사람들과 희망적인 일들이 더 많았던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교직생활 6년 차에 완전히 지쳐버리고 나서, 논문 학기만 남겨둔 대학원도 잠깐 미뤄두고서,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입시 정보들도 이래저래 쌓인 디렉토리도 아깝지만.. 아깝고 말고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어서 휴직. 도통 낫지 않는 감기를 낯설 틈 없이 앓다가, 없던 눈 알레르기에, 별거 아닌데 나을 듯 아닐 듯 낫지 않는 발목으로 일상이 불편해지고서야, 그제서야 비로소 쉰다.



내가 알아서 브레이크를 밟을 줄은 아직 모르나 보다. 연료가 다 소진되고, 여기저기 긁히고 블랙박스와 사이드미러 등의 사소한 결함이 쌓여 주행에 불편함이 커져야만 멈춘다.



한동안 손에 쥔 것들이 많았나 보다. 내려놓기 싫고, 잃기 두렵고, 내 힘으로 일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았나 보다. 그렇다 보니 몸에도 맘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고 긴장되어 지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인 수학 시험을 치르는 꿈을 반복해서 꿨나 보다.



그래 나는 항복이야.. 비로소 오랜만에 항복이야.. 여기저기 다 고장 나서야 백기를 든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려고? 어떤 배움들이 있으려고? 한동안 망각하고 있었네. 뭔가가 너무 꽉 차있는 밀폐용기에는 새로운 것이 담길 수 없다. 빈 그릇, 비든 눈이든 에라 모르겠다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열려 있는 빈 그릇에야 새로운 것이 담기지.. 그래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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