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집순이 생활(feat. 코로나바이러스)
※ 의식의 흐름 주의(모든 글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였지만, 이 글은 더 그렇습니다.)
2주 전부터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집순이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사실 일주일 내내 밖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 밖순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체력과 피로회복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정면으로 느끼며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가 만연한 시국에 약속도 취소되고, 필라테스 센터도 휴관을 하고,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이렇게 비자발적으로 집순이 생활이 시작됐다. 회사에선 매일 ‘집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데, 드디어 그 생각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 침대에 누워있기
집에 있으면 제일 좋은 것. 누워있을 수 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집에 있는 시간 중 70%는 누워있는다. 왜 평소엔 그렇게 직립보행이 힘든 걸까. 자세가 안 좋아서 매일 구부정하게 앉아있는데 누워있는 게 척추와 목 건강에도 좋은 것 같다. (물론 누워서 핸드폰을 하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집순이 생활을 위해 침대에서 읽을 책도 준비했고, 넥플릭스에서 볼 드라마 목록도 정리했으며, 실시간으로 뉴스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해본 결과 침대에서 뭘 해도 짧은 시간 안에 높은 확률로 ‘잠’으로 귀결된다. 사실 평일에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마 몇 시간 못 자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것 같다. 알람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주도적으로 잠을 컨트롤한다는 건 게으르지만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며칠 잠만 자다 보니 이제 잠도 안 오고 머리가 아팠다.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니까 역시 다른 걸 하고 싶어졌다.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이 한계가 있다지만, 나는 그 5단계 이론에 매우 공감하는 사람)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2. 넷플릭스 보기
원래 책을 많이 못 읽지만, 넷플릭스를 알게 된 후 독서량이 급감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드라마들이 너무 재미있는데. 이 시국에 사람들이 집콕하게 해주는데 넷플릭스가 큰 기여를 한다고 단언한다. 물론 나의 표본은 주변 사람들. 여기 넷플 중독 1인. 요즘은 지정생존자를 보는 중인데, 아무리 졸려도 끌 수가 없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보는데 온몸이 쑤신다. 똑바로 누워도 오른쪽, 왼쪽으로 바꿔 누워도 불편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잉여롭지만, 솔직히 그만 볼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결국 편하게 보려고 침대용 휴대폰 거치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점점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작은 화면 때문이지, 눈이 아파서 일하거나 공부할 때 쓰는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고 봐도 눈이 시리다. 그래서 화면을 TV로 연결할 수 있는 장비를 살까 고민 중이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누워서 천장으로 쏘는 빔을 설치할 것이다! ‘그래 안 할 것도 아니고, 이왕 할 거면 잉여생활도 건강을 지키며 하자’라고 합리화해본다.
3. 요리하기
평소에 요리라곤 하지도 않는데 심심하니까 참 쓸데없는 용기가 생긴다. 유일하게 요리하는 거라면 비빔면인데, 이상하게 도전의식이 생겼다. 무슨 자신감인지 요리를 안 한 거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혼한 언니들을 보면 그전에는 나처럼 요리를 하나도 안 하다가 갑자기 주부 9단이 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그걸 보고 나도 레시피대로만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떡볶이와 참치마요 덮밥을 만들려고 슈퍼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모두 사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나서 시작했다. “고추장 3스푼? 오케이 고추장이 숟가락에서 제대로 안 떨어지네 괜찮아 패스! 그다음 고춧가루 2스푼? 굿! 설탕 2스푼? 헉 더 들어갔네… 그렇담 간장은 1스푼이지만 좀 더 넣어야겠지? 1스푼 반!’ 하면서...떡볶이는 점점 망해갔다. 이런 계량 방식이 문제였을까? 나름 계산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이상한 거지? 의기소침해져서 참치마요 덮밥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쓸데없이 재료 사고, 주방 어지럽히고, 맛있지도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 역시 요리는 사서 먹는 게 최고다!
4. 정리 정돈하기
요리도 실패하고, 방을 둘러보니 책상, 화장대, 그리고 행거가 눈에 보였다. 갑자기 눈에 보이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답답했다. ‘이렇게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이상하게 한 번 의식하니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필요 없는 물건은 싹 버리자 생각하며 정리 정돈을 시작했다. 일단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있었다. 시작할 때는 다 버리고 싶었는데 찬찬히 하나씩 훑어보니,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유행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물건도 있었고, 지금은 쓸 수 없지만 추억이 있는 물건도 있었다. 또 필요는 없지만 버리기엔 비싼 물건, 그리고 예전 핸드폰들과 노트북 등 버리고 싶어도 버리는 과정이 골치 아파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도 많았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다 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일단 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버리고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무소유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정리 정돈을 하면서 소비 생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더 이상 물건을 놓을 공간도 부족하고, 살 예산도 한정돼있기 때문이다. 살림살이가 늘어나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점점 늘어난다. 나는 Minimalist가 되고 싶은 Maximalist 인가 보다. 극단적으로 100만 원을 한 번에 다 쓰는 사람과 100만 원을 100번 나눠서 쓰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나는 후자에 가깝다. 또 좋은 것이 있으면 색깔 별로 사는 편이다. 그리고 꼭 필요하지 않아도 여러 개 사놓는다. 이런 소비생활이 나를 점점 물건에 둘러싸이게 만들었다. 이제는 안되겠다. 앞으로 물건을 살 때는 꼭 필요한지 따져보고, 가격에 혹하지 말고, 딱 한 개만 사자고 다짐했다. 합리적 소비자로 변신해보자!
게으름뱅이 커밍아웃을 한 것 같아 부끄럽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2주 주말 동안의 집순이 생활기다. 비자발적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혼자 시간을 보내며 즐거울 수 있었다. 쌓아뒀던 집안일도 하고, 밖에선 할 수 없었던 생각들도 하게 됐다. 그러면 앞으로도 집순이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역시 나는 밖순이다. 게으르지만, 또 너무 게으르면 불안함을 느낀다. 어쩔 수 없나 보다. 예전처럼 외부 활동을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시국에 자제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외부 활동은 할 수는 없다. 지금 정부관계자, 지자체, 의료진, 방역해주시는 분 등 많은 분들이 일선에서 고생하고 계신다. 감사한 마음이다. 도움이 못되니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마스크 잘 쓰고 다니기, 개인위생 신경 쓰기, 되도록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기 등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켜야겠다. 모쪼록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이 사태가 빨리 종식되길 바란다.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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