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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Mar 10. 2023

배우라는 슬픔에 대하여

연극 '분장실'을 보고

***이 리뷰에는 엄청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관람 후에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배우는 언제 죽는가. 배우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공개된 작품에 출연했다면 그는 배우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는 작가여도 책을 냈다면 작가인 것과 마찬가지다. 영원불멸의 고고한 작품을 남긴 배우나 그렇지 않은 배우나 배우는 배우다. 배우는 그 어떤 직업보다 인정이 필요한 직업이지만 그와 동시에 배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좋은 배우는 균형을 잘 잡는 배우다. 그리고 연극 '분장실'은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분장실'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공연 중인 어느 극장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네 명의 배우들의 연기 열정과 삶에 대한 회한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품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2021년 초연 됐고, 2년여 만에 돌아왔다. 2023년 '분장실'에는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이 등장한다. 송옥숙, 황석정, 서영희, 백현주, 이일화, 함은정 등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으로 활약하는 배우들이 무대를 채운다. '분장실'은 무대의 변화 없이 오직 4명의 배우들로만 진행되는 만큼 배우들의 합이나 연기의 밀도가 중요한 작품이다. 그만큼 배우가 중요한 작품이다.


'분장실'은 4명의 배우가 나온다. A와 B는 그 누구보다 간절히 무대 위에 서기를 원했지만 늘 단역이었고 주연을 도와주는 프롬프터로서 살았다. 배우가 뭐라고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A는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몸을 던졌고, B는 배우가 되기 위해 가출까지 해서 질이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난다. A는 주연도 아닌 여자 배역을 맡아 무대 위에 서는 것이 꿈이고, B는 '갈매기'의 니나 역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분장실은 하염없는 대기실일 뿐이다.


C는 '갈매기'의 니나 역을 맡은 주인공이자 드라마 출연 제안까지 받으며 잘 나가는 배우다. 하지만 C에게는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며 배우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D는 C의 언더(주연배우가 문제가 있을 때 대신 투입되는 배우)이자 프롬프터(배우에게 동작과 대사를 알려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병원에 다녀온 이후 자신이 주연이라고 착각을 하며 C에게 니나 역을 내놓으라고 한다.


극 초반에는 단역배우인 A와 B 대 C의 갈등 상황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C를 끊임없이 질투하는 B와 그런 B를 말리는 A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C가 연기하러 무대 위로 올라간 순간 A와 B는 자신들의 과거를 말해주며 자연스럽게 자신들에 대해 알려준다. 오직 무대에 서기 위해 갈망하는 두 사람은 끝까지 선택받지 못하고 분장실에서 대기하는 존재로 남을 뿐이다.

어른은 닳고 닳아버린 존재들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열정과 희망이 닳고 닳아버린 이들이 어른이 된다. 닳아버렸기에 열정에 휩싸여서 실수하거나 헛된 희망에 기대 날뛰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서 하루하루 닳아버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다. A와 B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주연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현재 주연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A는 주연이 아닌 여자 배역만으로도 만족할 뿐이고 B는 연극이나 연기에 대해 관심이 없고 오직 스타라는 후광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절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라질 경우 전혀 슬픔을 느끼지도 않으며 타자에게 빼앗길 경우 질투를 느끼지도 않고 두려움도 증오도 영혼의 동요도 겪지 않을 것이다.' A와 B는 연기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그들은 배우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현실을 그 누구보다 받아들여 버린다. 결국 그들이 귀신인 것은 그런 현실에 타협하여 무대 위에 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인정이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A와 B는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까지 포기해 버린다. 결국 두 사람은 무대를 거부하는 배우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귀신과 마찬가지로 전락해 벌니다. 


하지만 D는 다르다. D는 A와 B에게 여전히 배우가 될 수 있으며 무대 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스스로 무대 위에 선다. A와 B와 D는 무대 위에서 멕베스의 '세 자매'를 연기하며 배우로 다시 태어난다.


연극 중간에 등장하는 D는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작스럽게 베개를 들고 등장해 잠만 자다가 주연 역할을 내놓으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며 등장한다. D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객은 설득된다. D처럼 순수하게 아무런 물정도 모르고 뜨거운 열정을 바치다가 상처를 받고 엇나가는 시절을 누구나 겪어 봤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은 모르지만 여자 배우의 고민이나 업계의 생태를 촌철살인으로 짚어내는 D의 모습은 신들린 것처럼 보인다. D는 C의 고민과 갈등을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몰입을 이끌어내며 극 후반부를 끌고 나간다. 


D를 연기한 함은정이 더욱 돋보였다. D 캐릭터가 맡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힘들고 그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힘들다. 순수한 모습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습의 균형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걸 해내는 함은정은 배우로서도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티아라를 거쳐 다시 배우로 돌아온 함은정은 그동안의 연기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오랜 연기 경력을 쌓아온 내공이 엿보인다. 발성이나 발음도 다른 배우에 뒤처지지 않지만 순수하면서 악의 없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탁월하다. 연기하는 아이돌이라는 편견에 갇힌 함은정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다.


함은정은 티아라 시절부터 수많은 편견과 루머와 싸워왔다. 특히나 연기하는 아이돌을 혐오하는 시대를 정면으로 겪어왔다. 연기를 잘한다고 알려진 선배 배우들이 앞장서서 연기하는 아이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은 대중들은 물론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중받지 못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미운오리새끼 같은 연기돌이라는 호칭 속에서 함은정은 차근차근 배우로서 역량을 키웠다. 편견 때문에 함은정의 연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분이라면 이 연극이 편견을 벗어날 좋은 기회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정체성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란 결국 배우의 예술이다. 무대라는 공간 위에서 배우의 삶을 빌려 인생을 이야기하는 '분장실'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분장실'은 오는 5월까지 대학로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2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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