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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Jan 02. 2021

새해에 희망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영화 '배틀로얄'을 보고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넷플릭스의 바다에서 영화 '배틀로얄'을 발견했다. 2002년 4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어느덧 20년전 영화가 됐다. 10번은 넘게 봤을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띄었다.


'배틀로얄'은 실업률이 15%, 1천만명의 실업자 등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는 일본을 배경으로 '신세기교육개혁법(BR법)'이 공표된다. BR 법은 전국의 중학교 3학년 중에서 매년 한 학급을 행동범위가 제한된 일반인이 없는 장소에 이송하여 한 사람씩 지도와 일정의 음식, 그리고 여러 가지 무기중 한가지씩을 나눠 주고,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한다는 법률이다. 제한 시간 3일 동안 위법 행위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죽이되, 규칙을 어길 경우에는 특수 목걸이가 폭파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나하라 슈야(후지와라 타츠야 분)의 반이 이 게임에 합류하게 된다.


'배틀로얄'의 매력은 잔혹한 설정과 그 보다 더 고어한 연출이다. '배틀로얄'의 감독 후쿠사쿠 킨지는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영향을 줬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피와 폭력의 정수를 보여준다. '배틀로얄'에서도 수 많은 학생들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죽어나가면서 영화의 긴장감이 계속 이어진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인을 처음 경험한 아이들이 흥분한 모습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어떤 고민이나 깊은 원한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을 죽인 명분을 찾아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빠져들게 된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발견한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중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지만 19금 영화라는 것이다. 중학생이 주인공이지만 어른을 관람층으로 생각하고 만들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중학생들의 모습은 사실 사회에서 발버둥치는 어른들일 뿐이다. 학생 시절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같은 반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삼는 입시제도를 비꼬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흘러 이 영화를 보니 입시제도 따위는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젊은 세대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넣은 무책임한 어른들을 향한 분노가 이 영화의 기저에 깔려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극한상황에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이들을 비웃고 비꼬고 욕하는 더럽게 치사한 어른들과 그런 권력이 있다고 착각하며 권력자들에게 감정이입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만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기업인들과 법조인들은 여러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고통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의 삶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의 중심에서 생기는 일들을 노란술 한 잔에 흘려보내며 스스로를 가끔 괴롭힐 뿐이다.


이 영화가 판타지인 것은 더럽고 치사한 어른들이 만드는 현실에서 싸우는 이들이 중학교 졸업반이라는 것이다. 실제 취준생이나 프리터나 기피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등장했다면 영화가 아니라 다큐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처참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어른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조금 귀엽고 멋지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다시 보기 싫은 역겨운 캐릭터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여자 주인공이 만든 과자에 애정을 보이지만 절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영화 중간에 마치 기타노가 여자 주인공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일 여자 주인공이 죽는 상황이었어도 절대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말로만 여자 주인공을 응원하고 격려 한다. 생명이 경각이 달린 사람에게 감기 조심하라는 말은 조롱일 뿐이다.


특히나 자기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 연민의 말을 늘어놓을 때 가장 추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외면하고 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모두 그가 그의 시간을 잘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람은 그럴 권리가 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이 있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방관자 였을 뿐이며, 자신이 하는 행동의 나쁜점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참여한 일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할 수 없게 되자 그냥 자포자기하고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기타노 다케시는 BR법의 취지에 대해 "너희들은 어른들을 깔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싸워서 가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같은 반 학생들이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싸우지 못해서 가치 있는 어른이 되지 못한 걸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무엇이 어른을 괴롭게 만들까. 어른들의 소중한 목숨을 가져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혐오와 악플과 모멸감과 수치심이 아닐까. 인간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살면 남는 것은 비참한 죽음 뿐이기에 인간답지 않게 마음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일까.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본 학생 시절에도 직장인으로 살아남은 지금도 여전히 새해는 난감하기만하다. 지난해를 완전히 잊지도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도 어정쩡한 시기다. 적어도 어른이 된 지금은 어설픈 희망보다 확실한 절망이 낫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됐다. 2021년 새해 이 영화를 만나 최악은 피했다.


p.s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한 '키즈 리턴'은 새해에 다른 의미로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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