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 Jul 06. 2020

가해자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신 뒤에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시, 나리오'는 2020년 7월 2일 개봉을 했다. '시, 나리오'는 9년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는 영화감독 경태가 전 여자친구 다운의 집 앞 놀이터에서 텐트를 치고 주변을 맴도는 이야기이다. 이별 후 전 남자친구들의 범죄가 비일비재한 대한민국에서 부적절한 소재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걱정과 우려 속에서 영화는 시작됐고,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범죄의 영역을 빗겨나가면서 불쾌하게 전개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정상을 정상처럼 보이게 만들고 정상을 비정상처럼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공감성 수치가 높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낯이 뜨거워서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 중 신소율이 연기하는 다운만이 정상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경태는 다운의 감정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는 다운에게 거짓말을 해서 헤어졌다고 고백 하면서 다운을 붙잡으려고 할 때도 거짓말을 한다. 경태는 의도적으로 찾아온 거면서 우연히 백팩킹 하러 찾아 온 곳이 다운의 집 앞이었다고 말하거나 다운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택배가 왔다고 태연하게 또 거짓말은 한다. 그리고 다운은 또 다시 상처를 받는다.


거짓말 때문에 이별을 하고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경태를 다운은 싫어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경태는 다운을 무시하고 그 누구보다 다운을 잘 알고 있기에 다운의 약한 마음을 이용한다. 경태의 행동은 협박범과 다르지 않다. 다운의 소중한 식구인 고양이를 아는 체 하거나 다운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빌미로 자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쓴다. 이 모든 과정은 경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관점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폭력적이다. 다운은 계속해서 경태가 싫다고 명확히 의사표현을 하지만 경태는 다운이 원하지 않는 친절을 베풀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 한다. 수 없이 자신의 의사가 거부당한 다운은 폭발하게 된다. 폭발 까지 이끈 장본인들은 다운을 보고 진정하라고 말린다. 끊임없이 민폐를 끼치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고 인생을 걸고 발악을 하는 것을 보고 온 사회가 손가락질 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또 하나 화가 나는 지점은 이 영화에서 시의 활용이다. 경태는 이 영화에서 박준의 '너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를 읽는다. 시를 다루는 영화에서 박준의 시를 꺼내드는 것은 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가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드문 상황에서 베스트셀러를 소개하는 것은 아무래도 진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계에는 여전히 주목받을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태는 시나리오 대신 시를 선택한 만큼 시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 경태가 쓴 시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시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있다. 시나리오와 시는 완전히 다른 장르이고, 시 역시도 시나리오 만큼이나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쓸 필요가 있다. 다만 시가 시나리오에 비해 자본주의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뿐이다. 경태는 시를 쓰는 것을 자신을 포장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아도 쓸 수 있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는 자본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무시받아도 되는 장르가 아니다. 


다운의 현재 연인인 권율(허규 분)이나 다운의 베스트 프렌드 혜림(한은선 분)도 전부 다 망가져 있는 캐릭터들이다. 무엇보다 혜림은 다운이 당하고 있는 상사의 갑질은 정확히 포인트를 알고 비난하면서 다운을 심리적으로 학대하고 괴롭히고 갑질을 하는 경태의 편을 드는 기이한 행동을 보여준다. 다운과 단 둘이 있을때의 혜림과 경태와 함께 있는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자유로운 영혼을 자처하는 권율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다만 다운을 연기한 신소율의 연기는 놀랍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영화의 흐름을 이어주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적어도 다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고 논리적이다. 그 누구보다 적절하게 영화의 감정선을 쥐고 흔들면서 관객을 몰입 하게 만든다. 모든 캐릭터가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지켜낸 신소율의 열정과 강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가 훨씬 더 많은 작품에 중요한 배역으로 등장하기를 바란다.


나는 극장에서 '시,나리오' 제 값을 주고 본 146명(2020년 7월 5일 기준) 중에 한 명이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고양이들만 아는 우리사이', '우리들의 이별후, 연애담'이라는 문구와 함께 두 배우가 환하게 웃고 있다. 포스터에 속아서 절대  VOD로라도 보지 않아야 할 영화다. 이별 후에 연애담은 없다. 오직 심리적인 학대와 강요와 끔찍한 능글맞음으로 포장된 범죄에 한없이 가까운 한 남자의 일그러진 시선만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에 희망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