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에서 만난 프랑스

Les Artisans d'Indochine

by 리트리버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치즈에 와인을 곁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와인 종류도 엄청나지만, 치즈 종류도 무지막지하게 많기 때문에 페어링 하기도 너무 어려운지라, 와인은 고기랑 먹어야 하고, 파스타 또는 생선이나 요리류와 함께 먹어야한다는게 내 주관이었다.


샤퀴테리 보드에 와인 한 잔? 그건 와인과 치즈에 능통한 사람들의 영역이지 내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호이안에서 토종 프렌치 형님 덕분에 그 영역을 잠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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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어다이 113번지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넘어와 호이안 구시가지의 등불과 관광객 인파를 벗어나서, 꾸어다이(Cửa Đại) 거리를 걷다가 한 가게를 발견했다. Les Artisans d'Indochine. 간판 글씨체부터 범상치 않다. 연두색 프렌치 도어, 벨 에포크 시대 포스터가 벽에 걸려 있고, 1층에는 샤퀴테리와 치즈를 직접 만드는 카운터가 보인다.


이 가게는 "Hoi An Salaisons"라는 프렌치 샤퀴테리 브랜드와 Cellier Indochine라는 프랑스 와인 수입·보틀링 업체가 합작해서 만든 공간이라거 한다.


쉽게 말하면, 프랑스식 수제 소시지 + 프랑스 와인 + 고급 식료품점이 한 지붕 아래 있는 거다.

근데 여기가 호이안이다. 베트남이다. 이 조합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보니 사장님이 본투비 프랑스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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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의 열정

2층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밤이었다. 산들산들한 바람이 불어오고, 멀리 호이안의 불빛이 보였다. 우기 끝자락이라 바람이 딱 좋았다. 샹송과 팝송이 적당한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사장님이 직접 올라오셨다. 프랑스분인데 엄청 친절하셨다. 메뉴를 설명해 주시다가, 아예 1층으로 내려가서 소시지를 만드는 작업 공간과 치즈를 숙성하는 곳까지 직접 보여주셨다. 이 가게의 샤퀴테리와 치즈는 전부 직접 만든다. 호이안에서 프랑스 방식으로 만드는데 베트남 현지 재료로 만드는 이상한 조합일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의 맑눈광 포스에 이 분은 정말 와인과 샤퀴테리에 미치신 분이구나 싶었다.


론(Rhône) 지역 와인을 주력으로 하신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론 지역 화이트 와인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다. 아까 말했던 맑눈광 포스가 웨스턴 분에게도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신기함 일단 시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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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프랑스

먼저 샤퀴테리 플래터가 나왔다. 나무 도마 위에 얇게 썬 소시지, 숙성 치즈, 옆에 코르니숑(작은 피클)과 바게트. 근데 이 바게트가 베트남 쌀 바게트였다.

프랑스식 샤퀴테리에 베트남 쌀 바게트라니. 무슨 크로스오버인지, 마블인지


소시송의 짭짤한 풍미, 치즈의 고소함, 코르니숑의 새콤함, 바게트의 바삭함. 네 박자가 맞아 들어다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만들고 전문가가 페어링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사장님이 다시 올라오시더니 물으셨다. 혹시 배가 고픈지 물어보시기에 굉장히 굶주린 상태였기에 Starving 이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웃으면서 오리 콩피(Confit de Canard)를 추천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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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콩피가 나왔다. 오븐에 구운 감자와 함께. 오리 다릿살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녹아서 내 미뢰세포에서 바람처럼 날라다니더니 목으로 그냥 넘어가버리는 신 경험을 해봤다. 감자도 포슬포슬하니 오븐에 정말 잘 구워져서 그 자체로 완성품이었다. 이건 맛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먹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종류의 음식이었다.


프랑스 시골에 에어비앤비를 갔는 호스티 할머니가 기분이라고 저녁을 주신 느낌이랄까. 가본 적은 없다. 근데 있다면 이런 맛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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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음식과 함께한 와인.

Belleville 2021 White, Rhône Valley


라벨에 프랑스 국기 삼색이 세로로 딱 박혀 있다. 13%. Cellier Indochine가 프랑스 론 밸리에서 원액을 수입해서 베트남 달랏에서 보틀링한 와인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베트남에서 병에 담겼다. 이 와인의 여권이라면 여권 스탬프가 두 개 찍혀 있는 셈이다.


품종은 샤르도네와 비오니에 블렌드. 잔에 따르니 밝은 금색에 살짝 초록빛이 감돌았다. 코를 가져다 대니 백후추 같은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한 모금 들이켜보면 섬세하면서도 크리스피한데 뒤에서 멘솔 같은 청량감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솔직히 말하면 와인 단품자체로는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퀴테리와의 궁합은 미친놈처럼 좋았다.


샤퀴테리의 짠맛과 와인의 크리스피한 산미가 서로를 끌어올렸고, 오리 콩피의 기름진 풍미를 와인의 청량감이 칼로 자르듯 잘라줬다. 이래서 이 사장님이 론 와인을 주력으로 하시는 거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호이안의 2층 테라스에서, 프랑스 사장님이 직접 만든 소시송을 베트남 쌀 바게트 위에 올려 먹고, 론 밸리 화이트 와인으로 곁들여 보니 수백년 동안 생존해 온 조합이라는 건 정말 무시할 수없는 것이란 걸 깊이 느꼈다.


게다가 저 와인 보틀과 샤퀴테리, 오리콩피까지 모두 합쳐서 약 900,000 VND 이었다.

현재 환율로 약 5만원인데, 2인에 와인 보틀에 저런 고퀄 샤퀴테리의 오리 콩피 요리까지 이 금액에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뻔한 호이안에서 진또배기 와인 페어링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여기를 방문해본다면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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