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삶, 애틋한 청춘
인생 2회차, 나는 오늘을 삽니다.
나는 암환자다.
그리고 이름을 바꿨다.
나는 35살이다. 1년째 살아남는 중이다.
34살, 만 32세였던 어느 날 초여름 나의 인생은 무너졌다.
시간을 돌려보면 참 바쁘게 살아온 삶이었다.
대한민국 K-장녀로 굳세게 살아온 나날이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내 밑으로 동생 둘이 더 있는 삼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제일 처음 모든 것이 내 것이었으나, 그 모든 걸 양보해야 하는 나였다. 물론 동생들은 '언니, 누나가 좋은 건 제일 먼저 가지지 않냐'라고 하면 '억울하면 네가 첫째 하던가'라고 핀잔을 주는 편이다.
무튼 K-장녀의 소명을 받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동생돌보기에 소임을 다했고,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열심히 공부했으며, 동생들도 가야 할 대학이었기에 사립대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다 붙은 곳도 포기하고 국립대인 집 근처 대학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항상 착한 어린이였으니 나는 다 좋았다. 물론 국립대에 성적 맞춰 온 과였지만, 부모님껜 인문학부라 말하고, 나는 사학과를 갔다.
애초에 역사 덕후였던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부모님도 국립대라면 하며 두 손 두발 들어서 '돈 안 되는 그런 과'라고 해도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붙은 곳은 돈 많이 드는 사립대 법학과였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까지 뒷바라지해야 하는 집안 형편상 내가 국립대를 가는 게 모두에게 해피엔딩이었으니깐.
무튼 나는 내 방식대로 나의 길을 찾았고, 적응도 잘해서 너무나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원래 좋아했던 과목이었으니 미친 듯이 해서 과탑도 해보고, 동아리 활동에 학생회까지 인싸 오브 인싸의 삶을 즐겼다.
사학과는 과 특성상 답사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고, 나는 그 핑계를 십분 활용해서 이제껏 즐기지 못한 인생을 만끽하듯 역사기행 동아리 활동을 하며 곳곳을 여행하고 선후배들과 술도 한잔하며 지금 우리가 살아온 삶과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시간들을 보냈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가장 정확하게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꽃이 피면 벚꽃나무 아래에서 막걸리를 마셨고, 친구의 고민은 맥주 한 캔과 맥스봉 하나로 해결했다. 답사는 댓꼬리라 불리는 소주 댓병을 중앙에 놓고, 새벽 세네시까지 자리를 파할 줄 모르는 곳임에도, 다음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강화도 마니산 정상의 첨성단까지 올라가는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랬다. 나는 젊었고 행복했다.
그 와중에도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에 손 벌리기 싫어서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알바 전선에 뛰어들었다. 독서실 알바를 하러 갔다가 독서실 주인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8,000원짜리 시간강사를 시작한 것이 나의 첫 아르바이트였다.
매달 월급을 밀리는 원장은 꼭 현금을 눈앞에서 세어서 용돈 주듯 주는 곳이었다. 강의 시간이 주 10시간이면 무료봉사로 보충강의를 10시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시간치 일을 하고 시급 4,000원의 아르바이트생이었음에도 나는 그 일을 감사히 했다.
학원 운영시간이 밤 10시로 제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시험기간에는 새벽 한 시, 두시까지도 남아서 학생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학생들이 다 돌아가면 나는 또 집에 와서 밀린 과제와 내 시험공부를 했다. 그렇게 버텨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에서 시급 12,000원까지 올랐고, 다른 학원에 일하는 선배 소개로 시급 1,5000원에 식사와 교통비가 지급되고 보충수업비도 따로 책정되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전보다 직접 강의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강의료는 많이 올라서 여유도 생겼다.
그러던 중 휴학을 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강의를 듣는 대상이 청소년에서 성인 혹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으로 바뀌었고,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다니는 학원이 아닌 간절함이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더 보람을 느꼈다. 물론 수업은 주 2회였으나 강의료는 그 어떤 곳보다 높았다. 점점 검정고시 강의를 하다 보니 주 2회, 1회 이런 식으로 강의 요청이 들어와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할 수 있었다.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한 부분을 내가 돕는다는 것과 늦은 나이에도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 말씀과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 한은 평생 간다는 말들이 나를 고민하게 했다. 대학만 가면 끝일 줄 알았는데 하시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나는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는 선택을 했고 나의 한계를 여전히 시험 중이다.
돈 안 되는 사학과에 그중에서도 더 돈 안 되는 고고학에 빠져서 2012년쯤 월 200만 원 정도를 강의를 해서 벌던 나는 일을 다 접고, 월 80만 원(세전)의 박물관 연구원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말이 월 80만 원이지 세금 떼고, 공용 잡비나 회식비, 발굴 현장이나 학회 갈 때 드는 비용 각출하고 나면 내손에 얼마 남지도 않는 삶이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함께 공부하는 동기가 있었고, 하루하루 버티며 한 공부였지만 학부 때와 다른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물관이 좋았다. '역사를 공부해서 뭐해먹고 살래?' 라던 부모님께 당당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해서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공을 살린다는 그 표현 그대로 내가 하는 공부가 헛되지 않고 어딘가에는 필요한 지식이라는 게 너무 행복했다.
말을 해서 먹고 살 줄 알았던 내가, 공부해서 살 길이 있겠구나 싶었고 그것이 좋아서 이 박물관 저 박물관을 옮겨 다니며 나의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았다. 물론 여전히 공부만 할 수 없던 형편인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조금 천천히였지만 꾸준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이어온 삶이었다. 급전이 필요할 땐 여전히 강사 일을 하던 언니들 부탁을 받고 대강도 몇 번 하고, 시험기간에 족집게 강의도 하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나는 고향을 떠나서 제법 큰 기관의 박물관에서 전시도 몇 번 해보고, 내손으로 전시 패널도 쓰고, 대중이 읽는 유물 해설도 적었다. 몇백 명 단위의 교육도 척척해내고, 나 스스로도 이만큼도 할 수 있어? 하는 일도 해내면서 점점 자신감을 얻어 가던 나였다.
이제 곧 참 애쓰고 살던 내 인생도 꽃이 피겠구나 싶은 날들이었다. 작년 초 옮긴 직장에선 디지털 전시 쪽으로 기획도 맡으면서 오, 이 프로젝트를 잘하고 나면 나는 또 성장해있겠구나 싶은 기대감이 있던 시기였다.
전시 준비를 하면서 여기저기 출장이 잦던 어느 날, 원래도 들쭉날쭉하던 생리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