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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페베 Dec 23. 2020

<장안12시진> 24시간이 모자란데, 모자라지 않다

인물, 드라마, 시청자의 시간은 모두 다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모두에게 시간은 상대적이다.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각 개체는 모두 다른 속도의 시간을 보낸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다만 아직 인간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내지 못하니 유의미할 정도의 격차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분명 우리는 모두 상대적인 속도의 시간을 살고 있다.

사실 심리 상태에 따라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똑같은 '나'여도,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실제로 엘리베이터 회사인 오티스는 '엘리베이터 속도가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에 대해 벽면에 거울을 달아 사람들이 시간을 재밌게 보내도록 유도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상대적인 시간이 있으니, 바로 '드라마의 시간'이다.

드라마 속 인물, 드라마 이야기, 드라마 밖의 시청자는 꽤나 다른 시간을 보낸다. 영상 이론으로 접근하면 Story duration(이야기 시간), Plot duration(플롯 시간), Screen duration(화면 시간)의 구분이 되겠다. 중드 특성 상 드라마의 재생 시간(duration)을 45분이라고 해보자. 시청자가 보는 화면의 시간은 45분이지만, 드라마 이야기에 나타난 시간도 과연 45분인가? 선협물이라면 한 회에도 몇 만 년씩이 지나갈 것이고, 회상이나 리플레이, 동시간 다른 인물의 교차 편집이 많은 작품이라면 45분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장안12시진>의 12시진, 즉 24시간 역시 굉장히 상대적으로 흐른다.

매우 직관적인 제목답게, 각 인물에게 주어진 시간은 12시진 뿐이다. (한 시진은 2시간) 

이 한정된 시간동안 인물들은 당나라 장안에서 각자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큰 줄기로는 대명절을 틈타 장안을 불태우려는 이민족들의 테러와 그에 대한 진압이라는 상반된 목표가 있고, 그 속에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한 동상이몽이 함께하며 구밀복검은 필수, 이합집산은 옵션일 만큼 배신과 음모가 난무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판타지로,  동명의 원작 소설은 드라마 <대장금>처럼 역사서에 기록된 단 한 줄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해 창작됐다. 요약하자면, 당나라의 정보기관인 정안사의 사승 '이필'이 전직 관리 출신이자 현직 사형수인 '장소경'과 함께 12시진 안에 테러를 막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나라의 정치 권력 암투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이 대혼란의 하루를 <장안12시진>은 48회에 꼼꼼히 나누어 담았다. 

약 38분 남짓한 한 회차당,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시간은 정확히 30분씩 흐른다. 이렇게 48회가 흐르면 '12시진', 즉 하루가 완성되는 참신한 구조다. '한정된 시간'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다운 시도다. 

하지만 정해진 30분 속, 실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은 채 30분이 안 된다. 테러에 대한 각 집단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차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안사와 이필의 시간, 장소경의 시간, 테러 집단의 시간, 정치권의 시간, 그 외 인물들의 시간은 한 회당 모두 30분씩 흐르지만, 시청자는 38분 남짓한 시간동안 드라마가 선택한 30분 속의 특정한 시간대만을 다섯 집단 중 몇몇의 눈으로 계속해서 다시 보게 된다. 


드라마 속 시간을 체험하는 방법, 30분

'한정된 시간'이 중요한 소재인 드라마에서, 

매 회차마다 정확히 30분씩 흐르는 포맷은 시청자로 하여금 드라마 속의 시간을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회차가 바뀔 때마다 시청자는 작중 시간이 30분 흘렀다는 것을 계속해서 인지하게 되므로, 제한된 시간 내에 빨리 상황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주인공들의 위기감과 긴박함이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또 각 인물 집단이 같은 30분을 어떻게 보내는 지 서로서로 교차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청자의 몰입도는 더욱 올라간다. 

심지어 시청자의 정보력은 주인공인 정안사 사승 이필과 장소경의 수준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시청자는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사건을 수사하는 둘의 시각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드라마를 시청하게 된다.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을 무려 48부작 장편드라마로 끌고 가는 구력은 여기서 생긴다.

같은 시간을 사는 네다섯 집단/인물의 스토리가 모두 각자의 시각에서 전개되는데, 각자는 서로 궁극적인 목표가 다르기 때문의 중심 스토리라인 자체가 굉장히 풍부하다. 또한 보통 중드가 그렇듯 인물의 과거사를 일명 '입전개' 혹은 엄청 생략된 회상으로 보여주지 않고, 시청자가 그것을 추리하고 수사하는 다른 누군가의 시각을 통해 알게끔 함으로써 궁금증과 미스터리함을 증폭시킨다. 

왼. 이필 (배우 이양천새) / 오. 장소경 (배우 뇌가음)

특히나 두 주인공인 이필과 장소경마저도 서로 붙어있을 때가 굉장히 적은 탓에... 각자의 목적도 다르고 수사 진행, 위기 상황이 따로 발생하므로 메인 스토리는 2배로 불어난다. 심지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사마저도 누군가 추리하기 전까진 시청자에게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들까지도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30분'이나' 혹은, 30분'밖에'

다만, '30분'은 좋은 포맷임과 동시에 <장안12시진>의 큰 벽으로 작용한다.

시청자가 몰입을 유지하고 재미를 느끼려면, 이야기의 전개가 있어야 한다. 특히 볼 것은 많고 시간은 없는 요즘 추세에서는 전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여기서 전개란 절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사건 혹은 감정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사건과 감정이 움직이는 것이다. 시간은 그저 사건이 생겨나고 감정이 변화할 밑바탕이 되어주며 이야기에 살을 붙일 뿐이다.


30분이나....?

때로 이야기의 흐름이 없을 경우, 드라마는 '편집'을 통해 빠른 전개를 유도한다.

그런데 <장안12시진>은 스토리 전개가 없어도, 재미가 없어도 30분 '이나' 보여줘야 한다. 그동안 발생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거나 재미가 없을 경우, 그 회차는 이야기의 전개가 사라지거나 느려진다. 

다시 말해, 드라마를 끌어나갈 동력을 잃어버린다.


예를 들어, 2시부터 2시 30분까지는 재밌는 사건이(보통 중심 스토리 전개와 관련된 것이 '재미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안12시진>은 그 30분을 '아무 일도 없어서 편집했습니다~'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드라마였으면 이야기 속 시간이 30분이 흐르던 3시간이 흐르던, 중심에서 벗어난 자투리 시간들은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정령>은 남망기가 위무선을 16년이나 기다렸지만 이를 한 회차는 커녕 16분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장안12시진>은 과감한 시간의 생략이 불가능하니, 메인 이야기 전개가 진행되지 않는 30분 동안은 자연스레 회차 전체가 루즈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그럼 30분을 메인 이야기로 채우면 되지 않냐?는 질문은 사실 무의미하다. 

<장안12시진>은 선협도 판타지도 아니다. 인물은 순간이동도, 시간 조작도 할 수 없으며 영력을 사용해 사건을 해결할 수도 없다. 결국 특정한 행동에는 그에 걸맞는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 결국 이런 회차에서는 노잼인 회상, 쓸데없는 장면, 별로 궁금하지 않은 조연 이야기가 삽입되어 회차의 듀레이션을 채우는데,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 삽입이 자연스러워지려면 당연히 앞뒤회차에도 관련된 씬이 들어가야 한다. 

즉, 재미없는 30분이 당첨된 회차는 앞뒤로도 늘어지게 되는 것.


보여줄 건 많고... 시간은 30분밖에 없고... (출처. 네이버 블로그)

30분 밖에...!

이렇게 필러(filler)를 위한 사건, 인물이 많아지는데, 여기서 또 '30분'이 발목을 잡는다.

당연히 뒤로 갈수록 드라마가 이야기를 풀어주고 맺어줘야 할 사건과 인물은 쌓이는데, 한 회차 당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은 정해진 30분'밖에' 없는 것이다. 정해진 30분 동안 발생하는 변화만 보여줄 수 있으니, 큰 스토리라인들은 후반부까지 풀리지 못하고 인물 감정선도 질질 끌린다. 한 회차에 풀릴만한 사건도 30분 포맷 아래서는 두세 회차 분량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유는 첫째, 30분 동안 사건이던 감정이던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기 힘들기 때문이며, 둘째, 서로 다른 인물의 시각이 교차 편집되므로 한 회차당 이야기가 실제로 흐를 수 있는 속도는 30분마저도 채 안 되기 때문이다.


<장안12시진>이 중반부부터 늘어진다-는 시청자 반응이 많은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초반에는 '테러 배후 수사 및 테러 방지'라는 선명한 플롯으로 진행되며, 인물의 수도 적고 스토리의 전체적인 구도 역시 뚜렷하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인물과 사건은 쌓이기만 하고 제대로 맺어지는 것은 없으면서 억지 긴장 요소나 이미 사용됐던 장치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어오니까 자연스레 플롯의 힘이 빠질 수밖에.


to. 이 글을 읽는 팬 혹은 제작진 여러분께...


스피디한 권력암투 or 원작소설을 기대한다면...

전개 빠른 중드 특유의 정치암투물에 익숙한 시청자에게는 안 맞을 지도.

암투물의 경우 반복되는 뒷통수와 배신을 통한 세력구도와 감정의 변화를 빠르게 전개해야 하는데, 여기는 30분 단위로만 한 회차가 진행되니 당연히 특유의 반전 재미가 훨씬 덜 산다. 30분씩 느릿느릿 흐르는데 어떻게 반전이 팍팍 발생하리오? 그러니 결국 반전을 주기 위한 장치는 오직 '사실 예전에 이랬는데 숨겼던 거야' 뿐인데, 이것이 모든 인물과 모든 반전에 적용이 되니 중반이 넘어가면 굉장히 뻔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누굴 궁으로 부르고 음모를 밝히고 훈계하고 감옥에 가두는 게 5분도 안 돼 모두 이루어지는 다른 암투물을 보다가, 누굴 궁으로 부르고 그 사람이 입궁하는 데만 한 회차가 온전히 들어가는 이 작품을 보면 재미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반대로, 비슷한 패턴의 암투물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도가 될 만은 하겠다.


"원작 소설은 정말 재밌는데, 드라마는 늘어진다" - 라는 말은 구조상 많을 수밖에 없다.

소설의 속도는 독자가 읽기 나름이다. 재미없는 부분은 휘릭휘릭 읽고, 쫀쫀한 부분은 집중해서 읽으면 된다. 또 줄글 특성상 인물 심리 묘사도 훨씬 다채로우니, 각 인물의 심리에 대한 몰입도도 훨씬 높고 멘탈 싸움이나 심리 반전 요소가 가미되기도 좋다. 하지만 드라마는 정해진 48회차, 재생 시간으로만 따지면 약 30시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시청이 필요한 데다가, 인물의 심리 표현은 오직 배우의 연기와 음악 정도가 전부이다. 

사실 '30분의 벽'이 없었더라면 더 빠른 컷편집과 이야기 속도 조절은 가능했겠지만, 아마 갈수록 전개가 늘어지고 지루해진다는 비판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 애초에 24시간의 이야기를 가지고 30시간이 넘게 만들어야 하니, 아무리 같은 시간 다른 인물의 다른 시각을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하더라도 지루함은 필연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드라마는 '30분 포맷'을 통해 포맷 자체의 신선함을 잡으려는 시도를 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빈지 뷰잉을 추천합니다

이 드라마는 영화같다. 그래서 무조건 몰아서 봐야 한다. 

물론 퀄리티도 영화같다는 뜻인데, 전개 방식도 영화같아서 나눠서 보기 시작하면 흐름을 놓치기 때문에 망한다는 뜻이다. <장안12시진>은 다른 드라마들이 하듯이 사건 설명이나 인물 감정을 다시 되짚어주지 않는다. 보통 영화는 2시간여 안에 끝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지만, 이건 드라마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되짚어주는 '친절한 전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장안12시진>은 영화의 퀄리티를 택하고 친절함을 포기했다.

드라마를 봉준호처럼 보자

이 불친절한 전개 덕에, 한 번 흐름을 놓쳐버리거나 끊어서 천천히 보다보면 스토리에 몰입하기 어렵다.

또한 인물과 사건의 라인을 선명하게 가져가면서 몰입을 유도해야 할 초반부마저도 전개가 불친절해서 '시청자 왕따 구간'이 존재한다는 자조적인 표현이 있을 정도다. 캐릭터 대사나 암시를 통해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것들, 보여줘야 하는 것들도 마치 영화처럼 시청자에게 추리를 유도할 뿐, 정확히 드러나지 않거나 굉장히 느리게 조금씩만 정보를 풀어준다. 예를 들어, '대안독술'은 이필이 하필 사형수인 장소경을 선택하게 한 이유로써, 작중 큰 의미가 있는 소재인데 이것이 무엇인지 드라마는 중반부가 다 되어서야 대충 알려준다. (추측하기론, 대안독술이라함은 빅데이터 같은 것이다.) 

아무리 호기심과 텐션을 유지하려는 장치였다한들, 뚜렷한 라인이 없으면 시청자는 뭘 보고서 인물과 사건에 몰입을 하겠는가?


또 이 드라마는 시청자가 각 인물들의 추리와 수사 과정에서 그들의 시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시청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보가 파편화된다. 예를 들어, A에 대한 정보가 a부터 e까지 있다면, a b c d e 정보는 서로 다른 인물에게 따로따로 전달된다. 시청자는 스스로 조합해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몰아서 보는 빈지 뷰잉이 아니라면, 사건을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드같은 웰메이드 중드

그러나 1000억 제작비답게, <장안12시진>은 퀄리티 자체가 '탈중드급'이다. 

자본의 냄새가 폴폴 난다. 스토리 자체의 한정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장안12시진>은 미스터리, 수사, 권력암투,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이질감 없이 잘 담아낸다. 중드답지 않은 훌륭한 CG(!!)와 무려 전체 동시녹음(!!!) 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대명절을 맞은 당나라 장안의 화려한 풍요로움과 그 뒤에 숨겨진 빈곤과 계급까지도 풍부하게 담아낸 미장센은 가히 영화를 능가한다. 화면의 색감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연출도 좋다.

밤거리, 그것도 당나라 장안의 밤을 이렇게나 화려하게 표현했으니 ... 1000억이 들었겠지

엄청난 대작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플랫폼에 풀린 탓에 이름 자체는 '웹드라마'인데, 결국 방영 이후에 두 개 위시 채널에서 사갔을 만큼 인기와 퀄리티 모두 보장. (애초에 중드의 웹드 개념은 한드와 조금 다르기에...) 중국 혁신 영향력 웹드라마 부문에 선정되기도!


이 제작진이 같은 원작소설 작가인 '마백용'의 작품 <낙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풍기낙양>을 준비중인데, 캐스팅이 무려 황헌, 왕이보, 송치엔(빅송)이다. 지난 11월 크랭크인과 거의 동시에 제작비와 제작 규모를 대놓고 자랑하는 웨이보를 올렸을 정도로 이 작품의 스케일과 퀄리티도 만만치 않을 예정이다. <장안12시진>을 즐겁게 시청하신 분들이라면 기대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무엇보다도 주연 이양천새와 뇌가음의 찰떡같은 연기.

TFBoys 멤버라 아이돌 특유의 연기를 보여줄 줄 알았던 이양천새가 <장안12시진>에서는 이필의 유약하면서도 단단하고, 때로는 치기어릴정도로 강단있는 심리를 잘 표현한 점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이필 캐릭터가 원작과 조금 다르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대본의 문제일 뿐 배우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뇌가음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사람 아니면 장소경을 누가 하겠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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