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이 손바닥보다 작은 종잇장이 된이야기
'앨범깡'을 아시나요? 잠시 설명하자면, 앨범깡이란 앨범을 사면 동봉되어있는 포토카드(이하 '포카')가 최애 멤버의 원하는 사진으로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앨범을 사고 뜯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앨범에 포토카드라는 게 들어간 그 순간부터 시작된 돌판의 유구한 역사지만, 특히나 포카의 시세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하필 내가 몸을 담가버린 모 팬덤에서 매우 극심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위다.
그리고 나는 이 앨범깡과 포카 대전에 참여해버리고 마는, 매우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 이 글은 그 후기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꽤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됐는데, 기다리고 계실 드라마 분석은 어디 가고 이런 하찮은 글을 들고 와서 혹여 실망하셨을 구독자분들께 죄송합니다.
슈뢰딩거의 포토카드
앨범깡을 위해 3월 초에 주문한 앨범들이 약 3주만에 겨우 출고돼 오늘 밤늦게서야 집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들었다. 박스를 뜯자마자 탄식과 험한 말이 함께 쏟아졌다. 랜덤 버전 앨범이 하필 중복으로 온 것이다. 중복 받기 싫어서 5분 텀을 두고 따로 주문하기까지 했거늘, 내가 원하던 버전은 한 장도 오지 않고 다른 버전만 중복으로 온 것이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앨범깡'에 도전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아시는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사고 실험으로, 어떤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으며, 이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안에 있는 고양이가 죽어있을 수도 있고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양자역학의 입장에서 상자가 열리기 전, 즉 관측 이전까지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다.
앨범 속 포토카드도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아서, 상자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포토카드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최애, 차애, 다른 멤버들이 모두 중첩된 상태이며 '내가 관측하는 행위'가 이 포토카드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상자를 열기 전까지 내내 마음을 정갈히 유지하고, BGM도 최애의 파트가 많은 곡을 틀어두고, 혹시 안에 있냐며 똑똑 두드리기까지 했는데 ....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쉽게도 내 최애와 차애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신 최차애는 아니지만 나름 교환이 잘 되는 인기 포카들이 등장해줬다. 하나는 너무 예뻐서 그만 탑로더를 씌워버렸고, 하나는 금세 교환이 구해진 덕에 곧 차애의 포카로 변신할 예정이며, 다른 포카들은 보관하다가 나중에 거취를 정할 예정.
그리고 최애를 얻지 못해 깊은 절망과 우울에 시달린 나는 충동적으로 최애의 포카를 그냥 양도받아버렸다!
10만원에 달하는 돈이 대화 몇 마디에 금세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잇장이 되었다. 주머니는 헐렁했쮜
여기서 잠깐! 포토카드가 10만원이나 하냐는 당신께 나는 슬프지만 그렇다고 답해드린다.
모든 팬덤과 모든 멤버가 이렇지는 않은데, 유독 내가 몸담은 이 팬덤에서 포카 시세가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보이지 않는 수만의 손'이라 하겠다.
보이지 않는 손,
그리고 서울 집값과 포토카드의 공통점
첫째, 많은 버전과 더 많은 멤버 수다. 멤버 수야 이미 이 그룹을 덕질하기 시작할 때부터 감안한 일이고, 여러 버전을 내서 지갑에 장난질을 쳐대는 것은 이미 10년도 더 넘게 이어져온 모 소속사의 오랜 전통이기에 그러려니 싶었지만 막상 포카 전쟁에 참여해보니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랜덤 앨범 한 장을 사서 원하는 버전을 받고 거기서 내 멤버 포카가 나올 확률이 7급공무원 공채 평균 경쟁률과 맞먹는다!
둘째, 수요 대비 공급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아니, 아예 물량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앨범을 365일 내내 팔아주면 팬들의 지갑이 앨범깡에 시달릴까 쓸데없이 배려해주는 소속사 덕에, 컴백 기간만 끝나면 해당 앨범은 아예 구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된다. 목이 빠져라 재판매 일정을 기다린다 한들, 몇 분 되지 않아 전부 품절돼버린다. 그러니 당연지사, 그 속에 들어있는 포카 가격은 점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이쯤 되면 수요 억제를 통해 포카 시세를 의도적으로 높여서, 포카의 화제성과 포카 소유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거꾸로 앨범 판매량을 늘리겠다는 소속사의 치밀한 계략이 아닐지 의심해본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 현상을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서울 집값이다.
수요를 과도하게 억제한 탓에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날이 고공행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부동산 투자에 대한 열망과 불패신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사회 전체에 받아들여지면서 더욱 수요가 몰리며 악순환이 반복되는 작금의 부동산 시장은 소름돋게도 마치 우리판의 포토카드 시세와 닮아있다.
소속사가 꾸준히 앨범을 재판매하여 공급이 늘지 않는 이상, 또는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여나 내 가수의 큰 병크가 터져서 수요가 급격히 줄지 않는 이상 우리 판의 포토카드 시세 역시 꾸준히 우상향할 것이다.
이 추세가 미래에 미칠 악영향 역시 부동산 시장과 닮았을 것이다.
앞서 유료 소통 문제를 다룬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미래의 캐시카우인 지금의 10대가 우리 판을, 어쩌면 케이팝 돌판을 떠나버릴 지도 모를만큼 현재의 포카 시세는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가 아니다. 현재의 2030이 부동산 구매를 포기하고 YOLO와 소확행으로 눈을 돌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은 생존과 주거의 문제이니 떠나기가 쉽지 않지만, 돌판은 그저 언제고 사라질 지 모르는 아가페적인 사랑에만 의지하고 있지 않는가.
애초에 학생들이 포카를 안 사면 되는 거 아니냐, 돈 있는 사람만 사면 되지 않냐고 할 지 모르지만 이것이 최근 확률형 아이템 논란에서 일명 '꼬접충'(꼬우면 게임 접어를 외치는 종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캐릭터 성능이나 플레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코디템, 캐시템을 사 본 이는 돌을 던지지 말라. 포카 역시 그런 존재다. 없어도 덕질을 할 수는 있지만, 있는 자의 덕질 라이프는 더욱 행복하고 없는 자는 그것이 부럽다.
또한 "꼬우면 접어" 라는 말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설령 아무리 이것이 소속사가 노린 고도의 전략이라 한들,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공급자가 만들어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왜 소비자에게 스스로 포기하여 해결하라며 돌리는가.
부동산 문제가 부동산을 비싼 값으로 사고파는 개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듯, 포카 시세 역시 거래자들의 양심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물론 투기꾼들마냥 의도적으로 값을 높게 불러대면서 시세를 높이는 개인들이 분명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는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형성된 데에 있다.
분명 이 판의 포카 시장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