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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기동 Aug 30. 2024

퀴어노트 글쓰기의 작심

레인보우 깃발에 수를 놓다

*한평생 퀴어


환갑을 맞은 나를 레즈비언 동지요, 벗이자, 사랑스러운 내 동생 이경은 ‘한평생 퀴어 여기동’라고 불러주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퀴어로 살아오면서 《보건의료 노동자로》병원에서, 국민연금에서, 《정신보건간호사로서》정신건강 분야에서, 《교수로서》대학에서 차별을 받았다. 그리고 필리핀 출신 남편 찰스의 한국 방문비자를 발급하는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 차별을 받았다. 


어디 이것뿐이었던가? 태어나서부터 환갑을 맞이한 지금까지 국가와 사회는 나를 차별하고 배제해 왔다. 앞으로 남은 생애에서도 이 괴롭힘은 지속될 것이다. 언제까지? 내가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퀴어의 생애 별로 따져 본다면, 성소수자가 당하는 차별은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혐오세력(이하 혐오세력)의 차별과 혐오에 온몸으로 맞서야 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나의 존재의 문제》이었다. 또한 억압과 지배 하에,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어는 곳에서든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 나 스스로의 자긍심이 결코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생애 첫 차별: 전라도에서 태어났다고


나는 1963년 전남 담양군 무정면 정석리에서 쉰둥이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셋 그리고 내가 막내였다. 우리 식구는 내가 4살 때 이사 온 서울은 나에게 고향과 같다. 초등학교와 (학교대표로 뽑혀 서울시 사생대회에 출전했던) 중학교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시각 디자인), 미술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대학을 진학할 수 없어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왈 “본적이 전라도라 취업할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본적을 (현재 살고 있는) 서울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버지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셨다. “뽑지 않은 회사는 안 가면 된다. (태어난) 태(胎) 자리는 바꾸는 것이 아니다.”즉 단호히 거부하셨다. 아버지는 본 적을 바꾸지 않으셨고, 지금까지 나의 본적은 ‘전라남도 담양군’이다. 이렇게 나는 타자에 의해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로)‘전라디언’이 되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 이것이 차별인지 몰랐다. 이것이 바로 출신 지역의 차별이었던 것을.


*동성결혼: 필리핀 출신의 이주노동자 남자랑 결혼했다고


2015년 5월 23일 인권재단사람에서 나는 남편 찰리또 까야사(Charlito Catalan Cayasa, 이하 찰스)와 결혼했다. 나의 (친정 식구들처럼 마음 든든하고, 늘 나의 편이 되어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회원들로부터 많은 박수와 축하를 받았고 행복한 결혼식을 마쳤다. 그렇지만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다. 동성결혼법이 없기 때문에.


이주노동자 출신인 남편은 체류 비자가 만료되어 더 이상 한국에 체류할 수 없게 되었다. 나와 결혼했으니 배우자 비자가 필요했지만 이것 또한 불가능했다.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힌)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남편은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붙잡힐까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나는 남편이 불안하게 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이유로 2016년 우리는 남편의 나라 필리핀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필리핀에서도 배우자 비자를 받을 수 없어 은퇴이민 비자로 체류하고 있다. 그리고 딸내미 하나를 입양하여 우리 슬하에 키우고 있다(2021년 필리핀 여아 입양, 필리핀 이름 레인보우 Rainbow, 한국 이름은 나의 성씨를 따서 여인보(呂仁寶)로 지었다). 법적으로 남편과 딸내미 그리고 나는 남남으로 살고 있다 


이렇게 꼬인 삶의 원인은 바로 우리가 남자와 남자가 결혼, 즉 동성결혼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그 잘 나빠진 ‘남과 여가 가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동성 간 결합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동성결혼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아니 이성결혼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만들어진 제도야? 아니잖아, 단군이래 단 한 번도 이성결혼 제도에 관한 합의는 없었잖아. 그런데 왜 동성커플에게만 사회적 합의를 강요하는 거야? 


차별을 당할 때마다 나는 속상했다. 억울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된 존재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다. 나의 성적지향과 퀴어다운 삶이 결코 타인에게 해(害)도 입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건만, 특히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남편의 비자가 거절당했을 때 나는 아주 거대한 벽 앞에 마주 섰다.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음을 느꼈을 때 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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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억울함은 분노로 밀려왔다. 늘 나는 자유롭게, 평등하게 그리고 존엄하게 살고 싶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믿고 살았다. 그래서 퀴어해방을 향한 투쟁의 길을 한걸음 또 한걸음 걸어왔다. 차별과 혐오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 없었다. 나의 《자긍심과 분노》때문에.


*퀴어노트: 왜 글을 쓰는가?


동성애혐오는 퀴어들을 짓밟고 숨을 쉬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악마의 목조르기와 같다. 마침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퀴어 동지들의 목숨마저 빼앗아간다. 고(故) 변희수[2] 하사 동지와 미국의 매튜 셰퍼드[3]와 같은 한국과 전 세계의 수많은 퀴어 동지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말이다

이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다름 아닌 동성애를 반대하는 혐오세력,  호모포비아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반하여 동성애를 단죄하고 ‘동성애자는 지옥에 떨어져라’라고 저주를 퍼붓는 보수기독교 자(者)들이다.


차별과 혐오는 무고한 성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이요, 폭력은 곧 사회적 범죄이다. 호모포비아들의 악행은 사회로부터 비판받아야만 한다. 법에 의해 처벌받고 그 파렴치한 혐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야만 한다. 그렇기 위해서 성소수자 개인과 단체는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차별받았는지 말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 가슴에 못 박힌 차별의 경험을 써내려 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겪은 고통이 바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성性)정치이기 때문이다.


2015년 남편과 결혼을 한 해에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 삶과 차별이야기 파일을 깔아 놓았었다. 나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새기기 위해 대문을 걸어 놓았었다. 그동안 나는 순간순간의 경험과 떠오른 퀴어한 단상을 끄적였고 (작문이 아니라 메모의 형식으로), 글쓰기는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펜을 들어야 할 시간이 왔다. 지금 나는 피난휴가(?) 중이다. 나의 일터에서 혐오세력을 피해 일주일간 휴가를 갖게 되었고,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의 퀴어노트는 ‘지극히 미약한 나’라는 개인적 존재가 사회적 맥락과 상황에서 경험한 차별과 혐오를 그린 스케치이다. 또한 퀴어의 자긍심과 분노, 그리고 퀴어한 철학과 정치사상을 가슴에 새긴 나의 사유(思惟)이다. 더불어 나의 레인보우 깃발에 수놓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시(詩)이다


#퀴어, *퀴어노트, #차별일기



[1]. 2019년 나는 한국에 입국하여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았다남편이 함께 동행하여 저를 간병하고 나의 가족과 퀴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 방문비자를 신청했다그러나 대사관은 남편의 한국 방문이 가족방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이성커플에게는 주는비자발급을 거부했다결국 모국에서 나는 병원에서 수술 후 2박 3일간 보호자 없이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2]. 고(故) 변희수 하사는 자신이 군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2020년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2020년 국방부로부터 강제전역을 당했다강제전역 1년 후,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국방부가 변하사 사망의 주된 원인은 강제전역 처분으로 인해 발병한 우울증으로 순직을 인정하였고이후 대전현충원 충혼당에 고이 잠들었다


[3]. 매튜 웨인 셰퍼드(Matthew Wayne Shepard)는 미국 와이오밍 대학교 정치학과에 재학 중인 22살의 청년이었다. 매튜 셰퍼드는 납치되어 울타리에 묶여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증오범죄 처벌법이 필요하다는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2009년 미국 의회는 ‘매튜 셰퍼드’와 인종증오살인의 피해자 ‘제임스 버드 주니어’의 이름을 딴 증오범죄예방법 《Matthew Shepard and James Byrd Jr. Hate Crime Prevention Act》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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