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사는 무지개인간의 서울 여행 마지막 날입니다.
어제는 집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오늘 아침은 조식을 신청하지 않고 늦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조식을 먹고 우당당탕 짐을 챙겨 나가는 것이 휴식과 상반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름의 과감한 결정을 했지요. 사람이 나무에 기대 서서 쉬고 있는 모습이 휴(休, 쉴 휴)라고 생각해 조식을 포기했지만, 하늘 높이 뜬 해를 못 본 척하며 나무 프레임으로 된 침대에 계속 기대 있을 수는 없는 요량이지요. 게다가 오늘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집은 떠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여기에 빨래거리들이 작은 산 하나를 만들겠지요. 아, 생각만 해도. 어제는 집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한 줄짜리입니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창문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명동대성당에 갈 것입니다. '성당 뷰'로 예약한 호텔의 방은 운이 좋게 제일 꼭대기층인 20층으로 배정을 받았지요. 매일 아침 커튼을 열 때마다 설레게 하던 그 뷰로 걸어 들어가 봅니다. 명동성당에서는 월~토요일 10시에 성지 미사가 봉헌됩니다. 그래서 성당 가는 길에 있는 뚜레쥬르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 여유롭게 명동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앞자리에 앉았더니 미사가 끝난 뒤,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 같은) 할머니들께서 아이들에게 예쁘다며 한 마디씩 하셨습니다. 한 분은 처음 만난 사이지만 가방에서 선물도 꺼내 주셨지요.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다시 느꼈답니다. 가슴에 새겨두고 자주 꺼내보는 마음,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채워준 사람들 덕분, 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요.
방을 빼야 되는 날에 이렇게 여유로운 오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호텔의 체크아웃 시간이 운이 좋게 12시였기 때문입니다. 미리 알아본 것은 아닌데 다른 곳보다 늦은 체크아웃 시간으로 커다란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이번 여행을 돕는 것 같았지요. 덕분에 성모동산에서 기도도 드리고, 성물방에서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 에어컨 바람을 쐬며 다음 일정을 논의했지요.
그러나 결론을 짓지 못한 채 체크아웃을 했지요. 가고 싶은 책방이 있었는데 멀어서 포기, 미술관도 가고 싶었지만 여유롭게 볼 시간이 되지 않아 포기, 그렇다면 맛있는 거라도 먹자 싶어 옛 추억이 있는 '수연산방'에 가고 싶었는데 과반수를 넘지 못해 좌절되었습니다. '수연산방'은 <엄마마중>이라는 그림책으로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상허 이태준 선생이 서울에서 거주하던 자택을 현재는 외종손녀가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10년 전에는 치밀한 눈치 작전으로 툇마루에 앉아 빙수를 먹었는데, 요즘은 그때보다 대기가 더 많은 것 같더라고요. 대기가 길어도 못 간 게 아쉬우니까 다음 기회에 꼭 방문하고 싶습니다.
결국 우리는 김포공항으로 갑니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는 4시 30분 출발 예정이지만 지하철을 타고 공항 근처로 가기로 했지요. 그곳에는 시원한 롯데몰이 있으니까요. 작은 짐이라 해도 짊어져야 할 것이 많은 여행은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데 롯데몰에서는 무료로 짐을 보관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점심 식사인 회전초밥을 먹었습니다. 역시나 시원하고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말차 가루를 시원한 물에 타서 먹는 것인데 일본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어요. 물론 가격은 세더라고요. '제주에서 회전초밥을 먹으러 가면 한 접시에 2,500원인데 여기는 대략 4,000원을 잡아야겠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맞은편으로 들어오던 '연어 키자미와사비'가 다시 꾹꾹 밀어 넣어 주었습니다. 성게알(우니)을 좋아하는데 '아는 맛일 텐데'라며 제주도 초밥집이 생각나 참았더니 오늘따라 태어나서 먹어 본 우니 중 가장 신선했다는 소리가 귀에 꽂힙니다.
아, 이런 아쉽게. 그래도 배가 빵빵해졌으니 괜찮습니다.
이번 여행은 더 많은 것을 담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오래 머문 여행이었어요.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떠오르고, 일상에 잘 복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뭐, 막상 닥치면 불평 없이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해내며 평소처럼 살겠지요.
오늘도 이번 여름휴가를 함께 한 책, 양귀자 작가의 <양귀자의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로 서울 여행과 글을 마무리합니다.
휴가만이라도 느긋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 휴가 동안만이라도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원칙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성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