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파편;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의 일부이다.
나츠하(夏葉)가 집을 떠나온 지 13년이 지났다.
성실하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정직한 일을 하던 10대 소녀는, 어느덧 노련한 8년 차 호스티스가 되었다.
그녀는 세상이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서만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웠다. 원하는 만큼 남성들의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면, 마음과 달리 몸짓과 표정을 능숙하게 위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늘어가는 돈만큼이나 삶에 대한 환멸과 인간에 대한 증오도 늘어갔다.
나츠하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13년이 지난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나츠하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가족들도 그녀를 찾기 위해 딱히 노력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잊고 산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나츠하의 개인 손님으로 부유한 70대 노인이 들어왔다. 나츠하는 속으로 한숨부터 쉬었다.
‘늙은이가 뭐 재미를 보자고 이런 델 와?’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세상 누구보다 상냥하고 매력적인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나츠하는 노인을 데리고 러브호텔로 향했다. 방에서 나츠하가 여느 때처럼 옷을 벗으려 하자, 노인이 갑자기 만류했다.
“사실 난 외로워서 온 거예요.”
그는 나츠하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화대보다 큰 액수의 돈다발을 내밀었다.
“나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래요? 1시간만요.”
나츠하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대체 왜 이 돈을 지불하고 호스티스와 이야기하고 싶어 할까? 나츠하는 지루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각오를 하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노인의 태도가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기에 경계심은 풀지 않고 있었다.
나츠하는 여러 일을 겪었는데, 손님을 위장한 미치광이 살인자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하늘이 도우사 미치광이의 몸놀림은 재빠르지 못했고, 나츠하는 생쥐보다 빠르게 방을 뛰쳐나가 순찰 중이던 경관을 만나 신고했고, 미치광이는 잠시 후 검거되었다.
큰돈을 만지려면 이런 류의 위험은 가끔 감내해야만 했다. 항상 어깨들을 대동하는 것도 모두 비용이 드는 일이니까.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나츠하에 대한 것들만 물었다.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어디 출신이고 학교는 다녔는지, 가족은 있는지, 이 일은 얼마나 했는지….
하나하나 대답하다 보니, 문득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나요?”
노인이 물었다. 나츠하의 목이 턱, 막혀왔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일 섹스 도중에 노인이 이런 질문을 했다면 ‘네,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요.’라고 양심에 반하는 허위 진술을 했겠지만, 삶에 대한 질문에 이런저런 대답을 하며 지난 시간을 고찰하는 중 저런 질문을 받으니, 나츠하라도 대답할 재간이 없었다.
어느 틈에 1시간이 지났고, 노인은 고맙다며 나츠하에게 얼마간의 지폐를 더 준 후 중절모를 쓰고 돌아섰다. 나츠하는 그가 왼발을 저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업소로 돌아간 나츠하는 정력적인 노인네에게 만족할 만한 섹스를 제공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약 일주일 후 그 노인이 업소에 찾아들었다. 노인은 즉각 나츠하에게 다가와서 러브호텔에 가자고 말했다. 주변 동료들이 킥킥거렸다.
“이봐 나츠하, 한탕 잡았는데? 꽤나 굉장했던 모양이지?”
“노인네한테 먹히는 스타일인가 봐.”
나츠하는 지난번 노인과 같이 갔던 바로 그 장소로 갔다. 이번에도 노인은 큰 액수의 돈다발을 쥐여 주었다. 나츠하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노인이 어떻게 나올지 이번에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지난번과 똑같이 나츠하에 대한 것들을 물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일들이 있는지, 친구는 많이 사귀었는지, 어떤 과목을 가장 좋아했는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는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형제자매와는 친한지….
나츠하는 큰 금액을 받아 마음의 안정을 찾고, 진지하게 질문에 집중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미래엔 빛이 없다고 믿었던 그 시절.
이번에도 한 시간 후에 노인은 중절모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면서 돈과 함께 편지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꼭 읽어봐요.”
노인은 떠났다. 나츠하는 겉옷을 걸쳐 입고 안주머니에 돈과 편지봉투를 쑤셔 넣었다. 그녀는 노인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거리로 나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돈은 지갑에 챙겨 넣고 편지는 서랍 속에 넣은 채 까맣게 잊어버렸다.
노인은 다음 주에도, 그다음 달에도 오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도.
나츠하는 다른 호스티스 바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짐을 싸게 됐다. 나츠하는 문득 노인이 생각났지만 이내 잊었다.
방을 비우며 서랍을 정리하다가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주소 하나가 적혀 있고 아래엔 점잖은 글씨체로 시간이 되면 꼭 방문해 달라, 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나츠하는 주소를 들여다보았으나 전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한참 뒤 그녀는 편지를 가방에 넣고 숙소를 떠났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1년이 흘렀다. 나츠하가 노인도 편지도, 그 주소도 잊을 무렵(나츠하는 가방 속을 잘 정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지역에 지진이 났다는 뉴스를 보다가, 그녀는 편지를 기억해 냈다.
그 주소가 속한 지역의 지진이었다. 나츠하는 노인이 베풀었던 호의와 질문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한 번은 노인의 말을 들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 지역은 나츠하가 있는 곳에서 기차로 세 시간이나 간 뒤, 다시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아주 깊은 시골 마을이었다. 나츠하는 3일 휴가를 내고(재정적 타격이 있었지만, 노인이 주었던 돈은 그것을 보충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그 주소지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나츠하는 우동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와 초콜릿을 사서 기차에 올랐다. 얼마 만인지 모를 여행, 목적지도 모르는 여행. 긴장이 풀리며 잠이 쏟아졌다. 나츠하의 머리카락에 햇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을 길로 접어드는 길은 멀미가 나도록 구불구불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츠하는 마을버스에서 내려 다시 5분 정도를 걸었다. 집이 한 채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옛날 가옥으로 미닫이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나츠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주 세게.
“누구시죠?”
나츠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안쪽에서 나왔다. 나츠하는 놀란 눈으로 남자와 2개의 영정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코…?”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13년 전에 나츠하가 떠났던 가족, 오빠였다. 영정 사진엔 나이 든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나츠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의 사진은…. 나츠하를 두 번 찾아온 70대 노인이 분명했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눈썹과 눈매, 코와 입 모양만은 똑같았다. 그 노인보다는 남자, 그러니까 오빠와 훨씬 비슷해 보였다. 나츠하의 심장은 충격에 멈춘 듯했다.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오빠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나츠하가 내가 아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이었다.
“어떤 전화를 한 통 받은 뒤 며칠 안 돼 돌아가셨지…. 아빠 전화였어.”
아빠라니. 6살 때 집을 나가 자살했다는 소식만 전하고 사라진 아빠라니. 원망만 남은 사람, 얼굴도 기억하지 않은 지 오랜데.
“아빠는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를 찾아왔어. 엄마가 암 투병 중이었을 때. 다행히 엄마는 죽기 전에 아빠로 인해 얻은 한을 모두 풀었지. 늦은 감이 있지만 홀가분하게 떠나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와의 한도…. 아빠와 두 달을 살았어.”
오빠는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아빠가 유산을 조금 남기셨대. 우리 각자 앞으로. 큰 액수는 아니야. 아마 지금쯤 지급이 완료되었을 거야.”
나츠하는 어떻게 법적 절차가 마무리될 수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츠하는 가명이고 법적으로 등록된 이름은 그대로이니 유산을 상속한다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편지를 받고 그녀는 집을 나왔다. 오빠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츠하도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나츠하는 다시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앉아 한참 뒤에 올 기차를 기다렸다.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편지를 열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더 이상 읽기가 싫었다. 거짓말.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어린아이였던 나를 버릴 수가 있어.
분노가 치솟았다. 잠시 뒤, 다시 편지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