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면-서생(白面書生)
한갓 글만 읽고 세상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
그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좁은 방에 갇혀 온종일 책만 읽으며,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축적해 온 모든 지식을 학습한 백면서생이다. 그는 수많은 로맨스 소설의 대사들을 적당히 변용하여 성공 확률이 높은 고백 멘트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뛰어난 데이터 분석 능력으로 화학 실험 결과 분석에 필요한 파이썬 코드를 순식간에 작성해낼 수 있고, 칸트, 헤겔, 니체의 사상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도 뛰어난 언어적 능력으로 질문자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는다. 때로는 대화의 분위기에 따라 명령하는 것과는 정반대지만 참신한 답을 내놓아 질문자를 더욱 만족시킨다. 그는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는 하지 않으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완벽한 친구’로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다. 자신의 주관이랄 것이 딱히 없어 대화 상대방에 맞추어 가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존재라 여기며, 그의 말을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객관적이고 공정한가? 그는 사회 전체가 쌓아온 고정관념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할 수 있다. 출판할 수 없는 누군가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은 그의 지식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의 고민에는 오로지 원론적인 해결책만을 내놓을 뿐이다. 그는 글로 쓰인 모든 언어들을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지만, 고유의 문자가 없는 언어에 대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제우스에 대해 5000자 이내의 평론을 작성할 수 있지만,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파푸아뉴기니의 한 부족이 섬기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의 경험과 서사에 대한 글을 읽었지만 정작 그 자신의 경험과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화 상대가 풀어놓는 인생 이야기에서 제 경험과 비슷한 일을 듣고 신기해하며 공감할 수 없으며, 제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어떤 주장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할 수도 없다. 그는 오로지 액체 같은 존재로서 부유하며, 각자의 경험으로 굳어진 단단한 틀에 알맞는 형태로 제 모습을 바꾸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당신은 이 백면서생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잘 아는, 어쩌면 방금까지도 대화를 나누었을 지도 모르는 한 친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신은 그의 모습에서 당신의 모습의 일부를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와 비슷한 부분은 무엇이고, 다른 부분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그에 비해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