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감성이 충만해지는 새벽녘이면 새파란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방금 떠오른 기억은 일학년, 아마도 삼월 어느 봄날의 기억이다. 유독 분위기가 좋았던 일학년 삼반의 교실이었고 밖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도서관으로 이동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던 국어 시간이었기에 교실에 남아 친구들과 조금의 잡담을 하고 있었고, 새로운 소식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우리 학년의 수업을 맡으셨던 K 선생님께서 아프셔서 윗 학년을 가르치시는 M 선생님이 대신 들어오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O 선배의 블로그 글에서 그 선생님과의 대화록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기대를 하고 있었다.
M 선생님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시고서는 대뜸 우리에게 받아쓰기를 시키셨다. 각자 흰 A4용지를 반으로 자른 A5사이즈의 백지에다가 번호를 작성하게 하고, 문장들을 하나하나 불러주셨다. 큼직한 네모칸이 있던 공책에 매일 학교가 마칠 때 즈음 받아쓰기를 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거의 팔 년만에 하는 받아쓰기였다. 어릴 때는 분명 열 개중에 못해도 여덟 개 이상은 항상 맞아 왔던 기억이 있었지만, 그 때는 왜인지 동그라미가 반을 넘을까 말까였다.
'왠지', '웬지'를 헛갈리게 하는 문장도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아무렴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문장은 "올해는 벚꽃이 언제 필는지" 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도 '-는지'라는 어미를 '-런지'라고 적었다. 왠지 감성적인 문구를 적고 싶을 때, 근대소설 문투를 내고 싶을 때, 입말로도 글말로도 써 왔던 익숙한 표현이었다. 막연한 추측과 공허한 물음의 정서를 나타내는 '-런지'라는 어미는 '아아, 떠나간 나의 첫사랑은 어디에 있을런지'와 같은 문구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올바른 표현이 '-런지'가 아니라 '-는지'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글을 쓸 때 '-런지'를 사용해왔던 희미한 기억들이 떠올랐으며, M 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못박아 부연 설명까지 해주셨기 때문이다. 과고생 치고는 중학생 시절 소설책을 다수 독파해 온 탓에 국어 실력에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나의 무지에 대해 희뿌연 배신감을 느끼고, 그 표현을 단번에 영구기억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나 '-는지'를 '-런지'로 헷갈리는 사람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구글에 어미 '-는지'의 맞춤법에 관해 검색하면 '-런지', '-른지' 등의 다양한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아 주는 글들이 몇몇 나온다. 심지어 2004년 작성된 인터넷 신문 기사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흠, 나만 헛갈리는 것이 아니었군. 그렇다면, 이 표현에 관해 별도로 찾아보거나 학교 등지에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는지'보다는 '-런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나의 작은 추측으로는 조금 더 익숙한 '-려는지'가 줄어 '-런지'가 되었고, 이것이 기본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단 것이다. 물론 나의 경험에 의거한 매우 약한 귀납적 추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큼큼.
대학에 와서 언어학에 관심을 가지며 문법을 대하는 두 관점인 '규범 문법'과 '기술 문법'의 차이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규범 문법은 명문화된 문법 기준에 따라 올바른 표현과 틀린 표현을 재단하도록 하는 관점이다. 학창 시절 국어 시험과 영어 시험에서의 채점 기준표,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표준어 규범 등이 그 예시이다. 영어로 예를 들자면 '선행사가 사람인 목적격 관계대명사는 whom이어야 한다' 와 같은 것들이 있다. 반대로 기술 문법은 어떤 언어의 모어 화자가 내면화하고 있는 문법 체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기술문법 연구자들은 모어 화자들에게 예문들을 제시하고 이를 자연스럽다고 여기는지, 어색하다고 여기는지를 묻는 '수용성 검증'을 반복하여 문법의 모델을 점차 구체화해간다. 기술 문법은 '옳거나 그른' 표현은 없다고 여긴다. 그저 자연스럽거나 어색한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 기준은 지역마다, 집단마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시간에 따라 점차 변화하기도 한다.
나는 '-는지'와 '-런지'의 사용에 대해 기술문법적으로 분석해보고 싶다. 과연 실제 화자들은 '-는지'와 '-런지' 중 무엇을 더욱 많이 사용하는지, 무엇을 더욱 자연스럽다고 느끼는지 조사하고 싶다. 그리고 그 비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지,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지 알아내고 싶다. 지역, 성별, 연령대, 교육 수준 등등 사회언어학적 요인을 하나씩 생각해본다. 물론 잠온다와 졸리다의 사용 배경에 관한 조사와 거의 비슷한 방법론으로 진행될 것 같지만 어느정도의 결론이 미리 정해져 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 주제는 완전히 미지의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니, 어쩌면 더욱 재미있는 연구가 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