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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13. 202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평생토록 노력할 것이 하나 있다면

    세상 누구도 내가 될 수 없고, 나 또한 나 아닌 누군가가 절대 될 수 없다. 이 행성에 종말이 찾아와도 영원토록 바뀌지 않을 불변의 진실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일로 아파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자. 정말 사랑하기에, 오직 그 사람의 편에 서서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그렇다면 함께 해결방안을 강구한다는 게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아니면 슬퍼해도 괜찮다고, 열심히 아파해도 된다며 어깨와 품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는 충분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 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좌절의 깊이를 어찌 알 수 있나. 거듭된 고민으로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거대한 막막함을 유영하는 기분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건조한 뉴스 이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힘들어하는 그 사람의 참담함을 넘겨짚을 권리가 내게도 있을까. 그 권리를 설사 어디선가 값비싸게 얻었다고 한들, 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할 능력은 슬프게도 내게는 없다. 이토록 모르는 것들 투성이인데, 대체 나란 존재는 어떻게 그 사람에게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는 건가. 위로와 위안이라는 것들도 역시 닿을 수 없는 아름다운 허상은 아닌 걸까.


    힘이 되어주고 싶고 마음을 달래주고 싶지만, 그 방식과 깊이에 대해서 나는 무지하다. 무작정 안아주며 언제나 네 편이라는 말을 전한들, 이게 그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공명을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 위로라는 게 가능할까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위로와 위안의 실존함을 살아오며 목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분명 나도 누군가에게로부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위로는 어떻게 기원되었고 구성되어 있었을까. 누군가가 될 수 없기에 우린 쉬이 남을 재단하지 말아야 하지만, 위로를 건네고픈 그 사람의 모든 걸 안다고 온전하고 한없이 충분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유사한 경험을 겪으면, '나 역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마음의 장벽을 조금 낮추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유사성이 동일함에 수렴할수록 어쩌면 위로의 말들이 더 와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고실험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환경과 배경에서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하여, 위로자의 품이 피위로자에게 더없이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험과 공감은 좋은 위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위로의 태도와 방식이다. 거기에, 어떤 시선으로 위로를 건네는지도 위로의 온도를 결정한다.

위로에도 학습이 필요하다.

    위로의 시선이란 같은 곳을 응시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위로를 건네려는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며 어떤 길을 걸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건네는 위로는 조금씩 더 정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응시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위로는 그저 공허함으로 수렴된다. 같은 슬픔을 함께 고요히 응시하고 여기서 눈을 떼지 않으며 위로를 건네는 것이 중요하다. 단 한 번도 나와 일치된 삶을 살아본 적 없던 누군가의 위로가 내 마음에 닿았을 때 역시, 상대방이 나와 본인의 시선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때였다. 어떤 사람이 나를 꽤나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알고 있다고만 느껴질 때는, 고맙기는 하지만 마음의 울림까지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위로가 되었던 경우는 아득함에 어떻게라도 닿으려는 그 사람의 노력이 느껴졌을 때였다. 그래도 세상에 한 명쯤은 나와 시선을 맞추고 같은 슬픔을 응시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그 마음의 온도가 전해졌을 때 나는 다소간의 위로받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감동 없이는 위로도 없다. 아주 긴 텍스트보다 잠깐의 품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것도, 상대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자 노력했음이 더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로는 능력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운동신경과 달리 위로 능력은 후천적 학습과 경험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 즐거울 것이 많지 않은 세상에서 희망을 아주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로를 건네고픈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충실히 따라간다면 따뜻한 위로 정도는 될 수 있다. 배경 지식과 정보가 많을수록 독해가 쉬워지는 건 비단 시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쩌면 좋은 위로의 시작은 한 사람을 읽어내려는 뭉클하고 애틋한 노력이다. 또한 남이 가진 고민이나 시련을 멋대로 재단하거나 축소하지 않아야 한다. '왜 그런 걸로 그 정도로 마음을 아파해?'와 같은 언어들만큼이나 잔인한 말은 없다. 위로를 건네는 사람의 태도와 방식이 중요한 이유다. 거기에,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며 중요한 무언가가 지금 내게도 무겁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즉 '공감'이 필요하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또는 가볍게 소비되는 공감이 아니다. 정말 진심으로 같이 걱정하면서 그럼에도 당신이 괜찮아지기를 바란다는 위로의 전 단계로서의 공감이 절실하다. 상대의 마음에 대해 우리는 모르는 게 훨씬 많다. 그러나 마음 안 아픈 어딘가에 위로의 말과 포옹이 정확히 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공감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 단계가 결여된 위로는 힘이 없다.


    위로는 어렵다. 좋은 위로만큼 행하거나 건네기 어려운 무언가는 또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위로는 어렵다. 말 뿐인 위로, 공허한 위로 그리고 진심 없는 위로 등, '위로'의 이름을 달고 되려 상대방을 더 아프게 하는 위로들이 있기에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넬 때는 특히 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 어려운 것을 한 순간에 쉽게 체득하기는 쉽지 않다. 우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좋은 위로 혹은 알맞은 위로를 건네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위로를 주고 받은 후에 더 나아진 위로를 건네며, 최소한 조금씩이라도 위로 능력을 키울 수는 있다. 물론 여기에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아무런 교류도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면 모를까, 서로 북적대며 살아가는 꽤나 괴로운 세상에서 위로를 주고받는 건 불가피하면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돕는 지지대다. 진심 어린 위로는 때론 한 사람을 지켜낼 수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평생을 공부할 게 있다면 그건 '슬픔'이라는 요지의 문장을 쓴 적 있다. 이 말을 빌려, 어쩌면 우리가 평생 연습하고 노력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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