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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Dec 03. 2023

상담만으로 해결 될 현실 같은 건 없겠지만

상담만으로 해결 될 현실 같은 건 없겠지만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심리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부터 직장에서의 애로사항이나 고충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상담 시간에 오고 갑니다. 한때 저는 상담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싫어한다'라는 말로는 상담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기 무척이나 부족해 보일 정도로 상담에 치를 떨었습니다. 상담을 받을 바에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겠다고 화를 낸 적도 있었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우습게도, 한때 저는 상담 시간만을 너무나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사람이 그때의 상담사였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진 않겠고 그 기억을 부러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도 않지만, 마음 안 모든 걸 꺼내놓았던 상담사에게 너무 큰 배신감을 느꼈던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이후 제 정신건강은 더욱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니, 상담이라는 걸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배신감을 재차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한 번 더 이전과 같은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때 어떻게든 바닥을 짚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어려웠습니다. 한 번 더 상담이라는 녀석에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에, 저는 그 믿음이 붕괴되었을 때 받는 상처에 대해서 단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았냐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상담을 다시 받은 지 어느덧 1년이 넘었습니다. 어느 날 상담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처럼 녹아버렸기 때문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상담이라도 받지 않으면 생을 지탱하기가 너무 버거웠습니다.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던 상담을 고려했을 만큼 1년 전 제 세상은 참 모질었습니다. 날씨로 따지면 너무나 혹독하고 차가운 겨울이었어요. 앞에서는 강하고 따가운 바람이 불어와 제 뺨을 할퀴고, 도무지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 괴로움이 너무 큰 날에는, 이쯤이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라는 서글픈 생각에 종일 매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체념도 여러 번 들었죠. 그런 생각들에만 파묻혀 생을 유기하다가, 어느 날 그 삶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저를 잠깐이나마 연민하게 되었습니다. 계기가 따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만 살다 보면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던 듯합니다. 조금이나마 제 생을 감당하는데 도움을 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것이, 제가 오래도록 파묻어버리고 결코 꺼내보지 않으려고 했던 선택지, 바로 상담이었습니다. 증오하는 상담에 다시 방문하는 고통이 그래도 당시의 상황을 맨몸으로 감당하는 것보다는 낮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우려했던 큰 상처는 아직 받지 않은 채로 상담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어릴 적 상담사에게 그랬듯 상담이라는 것에 정서적으로 너무 크게 의지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저는 고객이며 상담사가 책정한 금액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여 전문적인 대화를 할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할 때도 있습니다. 이 관계 설정이 나쁘지 않습니다. 위태롭던 날들에 시작했던 상담이, 그래도 제게는 미약한 힘이 됩니다. 무엇도 힘이 되기 어려운 세상에서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상담을 하며 저는 제 몫의 죄책감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 제게 일어나는 모든 아픈 일들은 다 제가 부족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상담 덕분에, 그중 대부분의 혐의들로부터 전 비교적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부당하게 기소하고 있었습니다. 제 부족함과 무능은 그 정도 이상으로 가혹한 자아비판을 당해야 했습니다. 상담이 진행됨에 따라, 결국 제 생각이 늘 저를 찌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수정하는 아주 지난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 아직도 우선 제게 혐의를 지우는 못되게 아픈 습관을 다 떨쳐내지는 못했고 그 끝은 요원해 보이지만, 어쨌든 이 지점을 계속 의식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그저 혐오스러웠으며 정말 많이 저주했던 바로 그 상담 덕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며 저를 묶고 있던 죄책감과 자괴감이 아주 약간은 느슨해지는 걸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워낙에 강했던 매듭이라, 그 정도로도 저는 약간의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지난 일들에서 저를 타박하기만 했던 그 동안의 상담이었는데, 이제는 과거 얘기에만 그치지 않고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제게 '미래'라는 건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당장 하루하루가 아프고 도 괴로우며 지금 이 순간을 버텨낼 수 있을 지조차 미지수인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가끔은 그 미래를 그리거나 상상합니다. 상황적으로 안정이 되고 이제 어느 정도 더 나이를 먹어 예전처럼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는 점이 최근 제 마음이 비교적 평온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마음의 상태를 얻기까지, 다시 받게 된 심리 상담이 그 기간을 조금이나마 줄여줌으로써 기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다시 상담을 찾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 상담을 시작하면서 상담사와 미리 하나만 약속한 게 있습니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다행히 지금껏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의식적으로 악을 쓰며 지켜냈던 약속이기도 했는데, 어느덧 이런 약속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살며 자연스럽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상담이 모든 아픈 마음들에 정답인 해결책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상담은 실제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삶이 모질게 느껴지고, 그럴 때 어디 하나 의지하기가 힘들다면, 상담을 통해 생을 지탱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감기 환자가 늘어나서인지 약국들이 꽤나 붐비고는 합니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병원을 가고 약을 찾듯, 마음이 괴롭거나 아플 때 상담을 찾는 것도 스스로를 아끼고 돌보는 너무도 당연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사라짐과 살아짐 사이에서 저는 살아짐을 택했고, 그때 생을 의지할 방안으로 상담을 다시 받는 걸 택했습니다. 그 선택이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시간이 더 지나야 확인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다행히도 상담 덕에 아주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가여웠던 하나의 생이 살아지고는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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