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emian Writer Mar 12. 2024

심규선, '소년에게'

노력의 배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노력의 배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모든 최선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때로는 결과 없는 공허한 고생과 수고도 존재한다. 그러나 정말이지 고생 많았다는 위로보다는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누적된 실패들에 참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못난 나를 자꾸 채근한다. 시대가 어떻고 세상이 어쨌든 결국은 나의 부족함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실패는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못난 내가 가장 밉고 싫을 때는 다른 이가 이루어낸 결과물에 온 마음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다. 전화 또는 메시지로 정말 축하한다는 말을 애써 건네지만, 그 기저에는 뒤틀리고 꼬여버린 열등감과 열패감이 있다. 물론 축하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는 것 까지는 못하겠다. 모자란 능력에 마음까지도 좁은 것 같아 괜히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 같은 출발선에 서있던 우리였는데. 언제 어떤 선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삶의 다음 단계로 가는 고통스러운 관문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삶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할 때는 누구나 불안과 우울 그리고 초조함을 느낀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 없이 문턱을 넘지 못한 나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지난 일들을 꼭 붙잡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이 무기력하고 무력하다. 결과 없는 고생은 그저 소모와 낭비만 야기할 뿐이었다. 사실 많이 지쳐있다. 이토록이나 지칠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무엇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저 마음에 무겁게 얹힐 뿐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실패를 통해서 뭔가를 배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지만, 몇 달 후 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내 노력과 최선의 방향성과 구체성을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실패해버린 고생과 수고를 다시 복기하는 것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진 않다. 정답이 없어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정답 없는 오답노트를 작성해야 하는 셈이다. 이렇게 한 번 경험을 했으니 다음에는 더 괜찮을 거라고, 더 잘 될 거라고, 이런 부질없는 말들을 스스로에게 건네지만 회의감만 든다. 다음에도 나는 똑같을 텐데 대체 무엇이 달라질지. 다음에도 이 기약 없는 짓을 반복하며 희망과 기대를 하고 절망하며 좌절하겠지. 그게 참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는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마저도 참 어렵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그렇게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잠식할 테다. 이제야 애써 정상궤도로 올라온 생활이 다시금 무의미해질 수 있다. 그러니 주문을 건다. 어떻게든 무너지지는 말자. 아무리 휘청이고 흔들리더라도 부디 무너지지는 말자. 무너져버리면 처음엔 조금 편할 수야 있겠지만, 결국 더 큰 아픔을 감당해야 하니까. 하지만 힘겹게라도 삶을 지탱할 무언가가 내게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바로 그게 자존감이거나 희망일 수도 있다. 나의 자존감은 원래 낮았고 희망은 그저 요원하다. 작은 균열에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상태라는 자각이 든다. 더 이상의 실패가 정말 많이 무섭다. 쉽게 도전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는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은 당연히 없지만 반대로 실패할 일도 없다. 성공과 성취의 기쁨보다 실패의 두려움이 더 큰 내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명제다. 그토록 지리멸렬하고 지난했던 지난 몇 개월의 생활을 그대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저 많이 아득하다. 온 마음 가득 기대를 하다가 체념하고 결과를 아프게 수용하는 회로를 또다시 겪어내야 한다. 그 소모전 속에서 지쳐갈 마음이 앞으로 얼마큼의 실패를 견뎌낼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다. 이런 세상에서 인생이 마냥 행복과 기쁨으로만 충만한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다. 다들 나름의 고민과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겠지. 그리 낙관적인 미래를 꿈꿀 상황은 아니니까. 그러나 남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이 그리 큰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삶의 괴로움은 모두 개별적인 각각의 고통이다. 내게 있어 손톱만큼의 고통이 타인이 겪는 우주 정도의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저 나에게 주어진 만큼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이제는 좀 지겹고 무겁기는 하지만. 최근 밖의 온도가 무척 차다. 시리다, 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차가운 날씨다. 바람이 아프게 불어온다. 겨울은 원래 추운 계절이다. 원래 추운 계절이 추워질 만큼 추워진 후에야 비로소 봄이 온다. 요즘 내 삶의 계절 역시 겨울이다. 삶의 찬바람에 마음이 많이 아리다. 결과 없는 고생을, 그리고 무엇도 되지 못한 자신을 감당하기가 조금 벅차다. 참 모진 찬바람이다. 하지만 생의 달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서 새로이 시작될 봄이 언제쯤 올 지는 모르겠다. 부디 그게 너무 늦게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근래에 심규선(Lucia)의 '소년에게'라는 노래가 맘 안에 오래 머무르는 중이다. '드러난 너의 흉터를 다독일 기회 주지 않겠니'라는 구절에 특히 마음이 쓰인다. 차고 시리며 모진 생의 바람에 드러난 상처와 흉터를 다독이는 일. 생각해보면 평생을 살면서 여태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충분히 그리고 따스히 다독인 적이 없었다. 끝내 완전히 지워질 수 없는 못나고 깊은 흉터라고 해도, 그래도 괜찮다고 또 그러면 어떠냐며 나 자신을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돌보는 일. 결과 없고 볼품 없는 고생이었지만, 그럼에도 참 수고했고 고생했다는 말을 내게 먼저 건네는 일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노력해봐야지. 물론 말처럼 쉽지 않고 자신도 없지만. 어쩌면 이 힘든 걸 해내는 그때서야 아주 미약한 봄 내음이 내 삶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2020년, 취업 준비를 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많은 3월 어느 날에 이 글을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이랬던 시절도 있었지라는 생각처럼 너무 아팠던 무언가도 지나간다는 사실이 조금의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소라, '바람이 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