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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감사한 뻔한 사랑 타령

연인과의 소중한 날들

by 사랑의 천문학

우습게도,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동요가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아기 염소 여럿이 풀 뜯어먹는 소리보다는 누군가가 그리워 죽겠다는 외침에 더 마음이 동했다. 진짜 조숙했던 것인지 한심한 또래들과는 달라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지금 봐도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어릴 때부터 사랑 타령이 참 좋았다. 그 애정이 무엇으로부터 발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꿈이고 장래희망이고 이런 시덥잖은 소리들보단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에 괜히 시선이 한 번 더 갔다. 나이에 비하면 과한 감수성이었지만, 예민했던 기질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어릴 때부터 주체적으로 발견했다고 합리화할 뿐이다. 사랑을 나눴던 두 사람이 헤어져버리는 일의 알싸한 애상감이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고 좋았다. 이후 나는 사춘기를 정통으로 맞은 호르몬 왕성한 청소년이 되었다. 에어백도 없이 터져버린 사춘기는 감수성을 주체할 수 없이 내게 끼얹었다. 이젠 좀, 사랑 타령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좋아해도 크게 이상할 나이가 아니었다. 어쩔 땐 사랑의 주체가 나 자신이 되기도 했다. 그리도 사랑 타령을 들어왔던 내게, 생각보다 사랑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최소한 모든 헤어짐이 이별 노래 속 격한 절규의 단계로까지 치환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란 이름 하에 무슨 일들이 정확히 일어나고 있는지 어린 나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지나치게 서툴렀다. 사랑이 아닌지 맞는지에 대해 명확히 구분해내지도 못한 채 사랑일 거라 짐작했던 시간일 지도 모르겠다.


이후에도 사랑의 말을 건네던 사람은 몇 번 있었다. 사랑이 단순한 좋아함과는 많이 다른 의미라는 걸 알게 해 준 사람도 있었다. 독립된 의미로서의 사랑의 실존을 증명해 준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이별할 때가 되니 슬픔에 모든 걸 게워내기도 했다. 공상으로만 생각했던 사랑 타령들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사랑을 하며 우린 참 많은 걸 서로에게 약속한다. 이별은 그 모든 약속들을 지켜지지 못한 것들의 무덤으로 보내는 일이다. 헤어질 때 보내야 하는 건 비단 상대방이라는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삶의 지난 시절 일부의 총체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별이 서글픈 건 그 시절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고, 헤어짐이 힘든 건 보내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 사람과 나눈 시절은 어쩔 땐 짧았고 어쩔 땐 보다 길었다. 길이의 유무에 상관없이 이별이 유쾌했던 적은 없으나,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긴 시간을 더 함께했을수록 보낼 게 많아지기는 했다. 삶의 작은 생채기에도 죽을 듯한 통증을 느꼈던 어렸던 날들을 지나, 이제는 그래도 많은 것들에 둔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시간이 내게 준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지난 시간보다는 무던해진 감각이다. 그랬음에도 헤어짐은 여전히 저밋했다. 지금의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아마도 연애라는 걸 당분간은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도 여겼다. 사랑이 소모처럼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마음을 건네는 것보다는 나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마음을 서로 나누는 행위 자체가 삶의 사치로만 느껴졌다.


그러다 지금의 연인과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연인의 밝음이 나의 어둠을 자주 비추었다. 맑은 언어들이 나의 부정을 조금 막아주기도 하였다. 그런 연인을 제 때에 만나 다행이라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최근이야말로 그래도 살면서 가장 멀쩡한 날들이다. 여전히 나는 자존감이 낮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나보다는 남을 욕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나를 그만 괴롭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느 때보다 열심인 요즘이다. 무엇보다, 나의 힘듦을 삶의 다른 영역에까지 전이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이 이제는 있다. 상대의 숭고한 의미와는 무관하게, 나의 괴로운 상황으로 모든 걸 놓아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참 비겁하고 못났지만, 그땐 나도 어렸다고 다만 비겁하게 변명할 뿐이다. 삶이 무거울 때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서 그 짐의 무게를 경감하기보다는 견뎌야 할 무언가를 무심하게도 버려대는 편이었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힘든 내게는 다 짐처럼만 느껴졌고, 괴로운 순간들에 기어코 혼자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쓰고는 했다. 못된 버릇이 지금의 연인을 만나고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연인은, 그때 나를 붙잡아주었다. 눈물 나게 고마운 지점이다. 밝고 맑아 어디서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나를 토닥여주는 것에서 나는 살아온 날을 반성했고 그래도 이번엔 달라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에게 가장 깊이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우리 사랑의 향방이 어디로 가게 될지는 우리조차 모르지만, 그게 어떤 길이든 이 사람의 삶을 내 손으로까지 모질게 만들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요 대신 듣던 사랑 타령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이별 이야기들이었다. 삶의 모든 게 도려내진 듯한 아픔에 울부짖는 노래들을 들으며, 나는 모든 이별이 저토록이나 끔찍할 거라 추측하고는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헤어짐이 그 지경은 아니었다. 이별이 저렇게나 힘들면 사랑 또한 어마어마하게 원대한 무엇일 거라고도 나는 상상하고는 했다. 사랑은 삶에서 대부분 아주 중요한 가치였고 미덕이었으나 언제나 삶의 첫 번째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연인과의 날들에서는 사랑이 지나치게 후순위로 밀리는 일은 없게 의식적으로도 노력하고 있다. 삶의 다른 영역의 중요성이 너무 커져 받고 있는 고마운 마음과 무엇보다 내가 품고 있는 소중한 마음을 부정하고 애써 누르고 싶지 않다. 사랑은 사랑대로, 순위와 무관한 영역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연인과 내가 나누는 언어 대부분은 실없고 철없는 이야기들이다. 모든 게 효용의 측면에서 재단되는 세상에서, 우린 참 귀한 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연인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건, 이 사람은 나를 존재만으로도 아껴준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내게 스칠 때마다, 내가 뭐라고 싶은 생각에 가끔은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아직 들키거나 티를 내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마음 안에는 고마움이 가득하다. 늘 사랑이 사랑 같기만 할 수는 없다. 심술은 사랑의 본능적인 성질이라 가끔은 추악해지기도 할 테다. 사랑의 심술을 그럴 때가 되었구나 하며 성실히 무시할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란다. 철부지 심통에 흔들리기에 우리는 이제 아주 귀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사람은 혼자면 외롭고 둘이면 빡친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 한 적 있었다. 사실 둘이면 빡치는 것보다는, 버거움이 먼저 생기고는 했다. 삶이 비에 젖을 때, 사랑은 물 먹은 솜이 되어 내 어꺠를 짓눌렀다. 현재도 행복이라 불러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 연애가 마냥 쉽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도 잘 함께 이겨내는 날들이 우리의 시간에 대부분이기를 바란다. 지난 연애들에서는, 고비를 넘을 생각을 그동안은 부끄럽지만 못해왔다. 지금의 소중한 사람을 지난 오답들을 열렬히 복기한 후 만나게 되어 다행인 지점도 있다. 누구와도 지지고 볶는 걸 정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난스런 성격이지만, 어느 정도 사랑에서는 그래도 된다는 마음이다. 어젯밤에도 자기 전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숱하게 나누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뭐 이렇게까지 많이 했나 하는 마음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겸연쩍어지기도 했다. 이거야 말로 이젠 내가 해대고 있는 사랑 타령이다. 이제 나는 동요 같은 건 아예 듣지 않을 나이다. 격하게 이별을 앓아대는 노래들에 대해서도 뭔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연인과의 사랑 타령만큼은 참 좋다. 연애의 가장 좋은 점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거나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사랑 타령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가치가 감가 되지 않는다는 게, 세상에 몇 안 되는 기적일 지도 모른다. 모진 세상의 날들에서, 때론 철없고 때론 실없이 나누는 사랑 타령으로 연인과 나의 삶이 보다 포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참 고마운 뻔한 사랑 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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