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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즐거울래요, 그게 뭔지도 잘 모르지만요

입사 4년 만의 '대리' 진급을 맞이하여

by 사랑의 천문학

대리가 됐다. 입사 후 첫 진급이다. 그 소박한 호칭이 참으로 눈물겹다. 큰 결격사유가 없다면 연차에 도달할 시 자동으로 대리가 되는 회사 시스템이다. 내게 큰 결격사유는 없었다는 회사 측의 공식적인 인정이 괜히 뭉클하다. 그래도 일인분은 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생각되게 되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인가 싶지만, 좋은 날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 때마다, 나는 살아만 있으면 맞이하게 되는 이 날이 뭐가 그리 특별한가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열 두시가 넘어갈 때부터는 누가 나의 생일을 처음으로 축하해 줄지 괜한 설렘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기어코 남겨지는 연락들이 참 감사하고 소중하다. 가만히 있으면야 다시금 맞이하는 생일이지만, 이리저리 힘든 일이 많은 일 년을 죽지 않고 살아낸다는 게 생각보다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일 년을 네 번 정도 곱한 시간이 흘러 진급을 맞이했다. 일 년도 쉽지 않은데 회사와 사회의 초년생 시절 어려움은 당연히 컸다. '어려움은 당연히 컸다'라는 구절로 그 모든 고됨들을 퉁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열렬히 앓아대는 초년생이었다. 큰 결격사유는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생의 시간이기도 했다. 작년에 서른을 맞이하며,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그 나이가 된 당연한 일에도 괜한 서글픔을 느꼈다. 올해 대리가 되며, 그동안 견뎌온 날들에 '잘 견뎠다'는 말을 붙일 수 있어 진심 어린 안도감이 생긴다.


살면서 무지했던 게 물론 겨우 한 두 개겠냐만은, 특히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들이 존재한다. 그 앎의 부재 대부분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삶의 대부분에 찾을 수 없던 이 질문의 공백이 생을 꽤나 공허하게 만들었다. 표류하던 대학 시절 방황의 변명을 거기서 찾았음에도, 당장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핑계로 나는 또 한 번 이 중요한 물음을 취업 이후로 연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약 없는 미래로의 유기였다. 그때 내가 버린 건 단순히 답 없던 주관식 문제 하나가 아니라 삶에 대한 책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대충 반 정도는 맞아서, 보상은 불확실하지만 벌은 종종 반드시 이루어진다. 인생의 혼선과 마음앓이가 내 형량이었다. 뭣도 아닌 삶은 종종 절대자의 흉내를 내고, 형기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나는 긴 터널에 갇혔다. 억울했다. 이 힘든 시대에 본인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시류에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던 괘씸죄가 이렇게나 커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형은 집행되었다. 회사에 출근하는 나날들이 내겐 괴로움투성이었다.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나마 파티션은 있는 회사라 다행이었다.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많이 받아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게워낸 적도 많았다. 놀랍게도 내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던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초년생 주제에 실수하고 모자란 걸 정작 나 자신이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니 누굴 탓할 수도 없어서 나는 더욱 아팠다. 아니, 아파해야 했다.


돌아가면 그러던 나를 말리고 싶다. 그만 좀 스스로에게 잔인하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게 되면 그렇게 스스로를 꾸짖는 나 자신을 방치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모양의 마음이니 내 삶의 일부 챕터들마다 반드시 지랄 맞게 됐던 순간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컸다. 누군가 또는 어딘가의 문제였을 테지만, 삶의 법정에서 이제 와 그들을 기소하고 싶지는 않다. 용서는 아니더라도 모난 나 때문에 아마 그들도 충분한 마음고생을 그동안 했을 거라 참작한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건조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보면 성인이 된 이후의 마음고생도 유년 시절에 귀인 시키는 비겁한 처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습관이 참 무섭다는 말로 그 변명을 갈음할 뿐이다. 지금 누군가 나의 후배로 회사에 들어온다면, 나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테다. 성격적으로 인간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신입 사원이 무엇이라도 능숙하게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내 초년생 시절을 지켜봤던 선배들과 상사들 또한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다. 주어진 과업을 성실히 따라가며 열심히 적응하는 것만이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내가 감당할 유일한 책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제대로 못해내면서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호소하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고 연기하며 허우적댔다. 그럴수록 정작 본질의 과제도 멀쩡히 수행할 수 없었고, 커지는 자괴감과 낮아지는 자존감 사이 벌어지는 격차를 무력히 지켜보기만 했다.

꼬질해진 사원증과 그나마 나를 즐겁게 하는 글 쓰는 PC를 엮어는 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 애처로운 시절이었고 날들이었다. 삶의 가장 부조리한 지점들 중 하나는, 지나고 봐야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여유를 가지고 조급해하지는 말라는 말을 해주던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게 맞았다고, 이제야 진심으로 답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그토록 내가 나의 무가치함을 있는 힘껏 부정하기 위해 힘썼던 건, 내가 어떤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 사는 데에만 열심이었다. 살아내느라 바빠서 그런 사치에 마음을 둘 여유가 솔직히 없었다. 지금 보면 사치가 아니라 필수였지만, 하루하루 잔존이라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내게 그것을 명확히 정의할 능력일랑 전무했다. 이제 와 그때를 후회하는 건 심하게 흔들리던 그게 나를 붙잡아줄 중요한 질문이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모르니, 일단 되는대로 대학에 왔고 졸업 즈음에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한 학기 동안 온전한 취업 실패와 그때의 바닥 치는 자존감과 열패감으로 인해 사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중한 것들에 작별을 고한 뒤, 나는 오로지 먹고 살 방편 하나 구하는 것에만 열렬히 소원했다. 그래도 간절했으니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당연히 괴로운 초년생 시기 나는 어디 하나 삶을 지지할 수 없었다. 취업은 됐으니, 그럼 이제 무엇을 또 할 것인가. 이는 당시의 상황과 겹쳐, 이런 일도 못하는 이 따위 내가 이곳 아닌 어딘가라도 쓸모와 소용을 증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탐구심은 없는 주제에 부정적 의심은 참 게걸스럽게 내 자존감을 먹어 치웠다. 그것을 막을 단단한 확신이 그때 내겐 하나도 없었다. 부서지고 몰락한 자존감으로 삶을 지탱하는 게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어떻게든 흘러, 때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이삭 줍기하고 때론 혼자만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놓아버리는 걸 지리하게 반복하다가, 나도 모르게 조금씩 주어진 현실에 적응을 해나갈 수 있었다. 여전히 낮은 자존감이라 외부의 시선에 생의 평가를 의탁하는 내게, 그래도 회사에서 '대리'라는 호칭을 부여해준 건 참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지난 괴로움이 마냥 유의미할 순 없어도 헛되기만 한 시간은 아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조금씩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예정이다. 우선 든 생각은, 즐겁고 싶다. 마냥 웃겠다는 게 아니다. 마음 안 슬픔을 억누르겠다는 것도 아니다. 한없이 들뜨는 것만이 즐거움의 유일한 발현은 아니다. 적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는 '즐거움'이라는 단어지만, 그래도 즐겁다는 말을 입에 머금을 때의 느낌이 좋아 최선으로 즐겁고 싶다.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생의 감각들에 무너지더라도 절망하지는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즐거움은 희망과 강력히 연계돼 있다. 최선을 다하여 즐겁겠다는 말은 희망을 어떻게든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말과 동의의 선언이다. 생이 대체로 즐거울 수 있게 살아보려고 한다. 즐거움이 뭔지 조차 제대로 정의할 수 없기에 당연히 방랑과 헤맴이 가득할 테다. 그러나 가치를 논의하는 층위에서, 다면적인 의미의 단어를 단 몇 줄의 언어로 완벽히 서술하는 건 그 어떤 철학가도 불가능했다. 그 논의가 끝나지 않았기에 여전히 깊이 있는 사고의 효용이 유효하다고 믿는다. 나도 재주가 없어 즐거운 삶이 뭔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남은 인생을 그 자체의 삶으로써 즐거움을 서술해 내기 위해 감히 동원하려고 한다. 아무튼 즐거웠던 것 같다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대리가 됐다. 클리셰가 아닌 문자그대로의 눈물의 날들을 버텨 이르게 된 눈물겨운 자리다. 여전히 나는 미숙할 테고 세상은 어렵겠지만, 이제는 미뤄왔던 질문을 내게 반복해서 물어보려고 한다. 번거로운 물음이 맞다. 아마도 태만한 인생은 다시 다음 이후에 생각해 보자며 질문을 회피하려고 애쓸 테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내고자 한다. 그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이 없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으며 나는 조금씩 더 나를 지키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 테다.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아무 미련도 없을 듯한 날들이 있었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흘러 내겐 추억이 생겼고, 그래도 생이 조금은 아까워졌다. 앞으로는 살아있는 시간에 충실하고 싶다. 그걸 위해 나를 덜 아프게 하려고도 한다. 즐거울 때, 삶이 즐거웠다. 당연하고 바보 같은 동어반복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삶이라면 나를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여 즐거워보려고 한다. 즐거움에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게 늘 먼저 의미부터 통달되는 건 아니니까. '즐거운 날들.' 훗날 돌이켜 본 내 남은 삶의 간결하고도 담백한 요약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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