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를 지키는 서글픈 동어반복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구절에 대해

by 사랑의 천문학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무 아픈 동어반복이다.


세상은 종종 버거웠고 자주 외로웠으나 이 문장을 곱씹으며 비로소 서글퍼지기도 했다. 추악한 무기력이라며 힘껏 돌을 던지기엔 그저 천진한 얼굴의 진실뿐인 구절이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안 되는 걸 안 되게 한 무엇이라도 찾기 위해 우린 샅샅이 삶을 훑을 테지만 마땅한 범인은 없다. 그저, 안 되는 게 안 됐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따위 비겁한 소리가 어디 있나 싶었다. 무엇이든 되게 하라던 세상 주제에 이딴 걸 가르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유년 시절 배우지 못하는 게 비단 술 따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절망에 대한 교육이 우리 세상에는 거의 전무하다. 추구에 대한 추동만 있다. 책임 없는 추동이다. 언제나 입이 틀어 막히는 나약한 좌절의 힘없는 외침만 존재한다. 답이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무지한 채 자란다. 미제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풀이를 포기하면 되려 비난을 받는다. 숱한 시험을 보며 컸다. 살면서 명확한 답이 있었던 건 시험과 시험을 위한 문제 풀이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삶의 작은 일각이 세상 어디에도 정답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지 못하게 했다. 세상 모든 걸 관통하는 정답은, 어디에나 정답이 있는 건 아니라는 역설이라는 걸 어렸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번번이 속수무책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었고 나를 할퀴기만 했다. 고통스러운 무지였다.


아무런 노력도 무용하다는 무기력할 뿐인 체념이 아니다. 그러나 체념하지 않음이 노력의 한계까지 물리적으로 지워버리는 공상적 세뇌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최선의 열심이 최선의 결과로 반드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최선이 아닌 결과도 언제나 열심이 아니었기에 비롯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분명 안 되는 게 있다. 이는 포기가 아니라 인정이고 수용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고 실험실이 아니다. 생생한 현실이다. 실제 적용되는 제약들을 무시한 논의는 비약에 불과하다. 노력과 열심은 고귀하고 숭고하지만 결과는 미덕의 심미성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삶의 대부분의 영역이 그렇다. 노력의 양과 결과의 질이 어느 정도 우상향의 비례성을 보이는 학습이 오히려 그나마의 예외다. 우린 살면서 많은 걸 바라며, 어떤 바람에는 간절해지기도 한다. '간절'까지 하다는 건 이루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인지에서 비롯된다. 지극히 당연하기만 한 일에 우리가 '간절'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린 가능성이라는 단어의 서글픈 이면을 평소에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잘 알고 있는데, 최선을 다 하여 이를 못 본 체한다. 우리가 구면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따라와 묻는 실패와 좌절에 대해 애써 생경한 척 대한다. 그러나 모두가 무언가에 절실해지는 세상에서 우리의 절실함만 유별날 순 없다. 실패를 선사하는 데 세상은 무차별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잘못으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모자람으로, 각자의 바람을 바람으로만 남겨야 한다. 고이 닫히는 소망의 문은 언제나 얼마간의 알싸한 통증을 마음에 유발할 뿐이다.


몇 번의 절망을 겪고서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비정하게 깨달았다. 왜 항상 삶의 가르침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교훈은 진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한 세상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앓게 된다. 안 되는 건, 정말 안 되는 거였다. 이를 마음으로 인정했을 때 비로소 생이 미약하게 편해졌고 세상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답을 못 찾는 게 아니라 어치피 해답이 없는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매진했던 것이었다. 답이 없는 구석이 있는 게 세상 그 자체였다. 질문이란 반드시 풀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끌어안고 뒹굴어야 할 현실에 가까웠다. 물음은 물음이었다. 답의 존재 여부는 크게 중요치 않은 물음들이기도 했다. 물음은 때로는 정언 명령에 가깝기도 했다. 왜 나는 안 되지,라는 의구심조차 가끔은 포기해야 했다. 이를 인지하게 됐을 때 무언가를 놓는 법을 배웠다. 너무 오랫동안 모르고 있던 삶의 방편이었다. 이전에는 미련과 회한의 붙잡음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고도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마무리되는 순간까지도 완벽한 해방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꺾이고 젖은 날개로 삶이 추락할 때 아주 조금은 성숙할 수 있다. 성숙함과 나이가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지만, 부조리하게도 성숙해지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은 세월에서 비롯된다. 너무 어릴 때 너무 많이 성숙하기 어려운 이유다.


실패의 순간보다 괴로웠던 건 애처로운 부정의 날들이었다. 헛된 부정의 귀결은 위악이었고 천덕스러움이었다. 삶의 무언가가 갉아먹히는 듯했다. 꿈을 놓치고 사랑을 보낼 때, 어리석었던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만 다시 열심히라면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기리라 착각했다. 삶은 가끔은 과하게 매정하다. 진심 어린 청원은 여러 번 반려됐다. 나이가 드는 게 꼭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최소한 이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됐다. 시간이 선물해 준 몇 안 되는 축복이다. 우리가 지키는 삶의 거처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방문하고 예고 없이 떠난다. 무례한 불청객과 갑작스러운 멀어짐에도 삶은 지켜져야 하고, '받아들임'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수용하거나 인정하지 못했으면서 다음 단계로 온전히 떠나기는 어렵다. 미련이나 후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못난 괴물이 삶의 챕터마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소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말이 되려 능동의 발현일 수 있기도 한 지점이다. 이미 발생한 어떤 일을 기어코 무시하고 부정하는 게 오히려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좌절의 순간에 비로소 포기하며 현실을 받아들일 때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는 해 본 사람만 안다. 그렇지만 그때 미련에 안쓰럽게 매달렸던 마음의 끈이 떨어졌기에 우린 다시 삶을 엮어낼 수 있다. 우린 이런 부조리한 역설을 관통하면서 매일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오히려 주문 같은 동어 반복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 짧은 구절 하나를 몰라서 더 서럽게 울었고 어쩔 줄 몰랐다. 이를 안다고 좌절의 통증이 완연히 줄어드는 건 아니다. 이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삶의 진실을 알게 됐다고 갑자기 든든한 방파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몇 번은 한 사람을 방문하는 절망들을 온전히 겪고 난 후, 최선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며 우린 지난날을 놓을 수 있다. 쥐어보지도 못 한 꿈과 사랑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저밋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마냥 천착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생의 매 순간들에 반드시 지혜로울 순 없지만, 우린 우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말은 우리를 주저앉게 하는 게 아니라, 되려 나아가게 북돋는 구절이게 된다. 되지 못한 것들을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는 시작과도 같은 문장이다. 성취의 희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의 폐허를 미어지게 감당해 보겠다는 거다. 감당하다가,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아픔에 괴로워하다가, 이 지리함을 반복하다가, 비로소 우리는 일어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어쨌든 살아야는 하는 삶이니까. 때론 의미 있는 생존이고 때론 무기력한 잔존이지만, 우리 삶이라는 존재마저 박탈돼서는 안 된다. 그 존재를 지키는 문장이, 너무 서글픈 역설이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진 내가 모난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