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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내가 모난 내게

스스로에게 따뜻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또 한 번의 책망

by 사랑의 천문학

상담에 의지했던 날들이 있었다. '잘 들어준다'는 그리고 '듣는 게 직업'이라는 상담사의 직업적 소명 의식에 기댄 시간이었다. 왜 이렇게 스스로에게 가혹하냐고, 상담을 받던 중 질문을 받았다. 맞는 말이었다. 누구에게든 아주 살가운 사람은 아니지만 유난히 내게는 엄격을 넘어 가혹할 때가 있다. 정확한 규범적 삶을 산다는 말이 아니라 나를 비난하고 채근한다는 이야기다. 모진 성격으로 스스로를 찌른다. 삶에 처음 생채기를 낸 게 누구든 결국 그걸 곪게 하는 건 나 자신이다. 스스로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성격이다. 그건 아마, 비관이 낙관을 언제나 앞지르는 부정적인 혹은 지랄 맞은 성격으로 태어났기 때문일 테다. 살아온 삶의 궤도에 비출 때 필요 이상의 '마이너스 과잉'일 수도 있다. 물론 생이 뜻대로만 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생은 세상에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삶이 희망과 언제나 반대였냐면 그것도 딱히 아니다. 바라던 게 이루어진 적도 존재는 했다. 그러니까, 비관이 낙관을 이 정도로 따돌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에피소드에 언제나 비관이 먼저 도착하여 스스로에 대한 비난의 씨앗을 퍼뜨린다. 생의 폐허를 마주할 때마다 나의 비관과 우울은 얼마 남지 않은 희망과 긍정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탐욕을 부린다. 때론 그들의 못된 식탐에 쉬이 삶은 무엇으로 지탱되지 못하고는 했다.


상담사는 이어, 스스로를 조금 불쌍히 여기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내가 불쌍할 수 있나. 이토록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 성실히 살다가 앞으로도 착실히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마련은 한, 이 정도뿐인 내가 불쌍할 자격이 있나. 단 한 번도 나 자신이 가여웠던 적이 없었다. 가여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여움과 불쌍의 카테고리에 나는 어떤 경우에서든 편입될 여지조차 없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이건 논외의 영역이었다. 너무나 충분하여 넘치기까지 했던 지지와 응원을 받았던 내가 어떻게 불쌍할 수 있을지 그 맥락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 말을 곱씹으며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걷다가 문득 느꼈다. 정작 나 스스로는 자신을 지지하거나 응원한 적이 없었다. 내 삶이지만 나는 언제나 수단으로의 객체에 불과했다.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동원했고 착취했다. 기대 이하의 결과에 나조차도 나를 위로할 수 없었고, 혹시나 성취라도 하면 다음의 분명해 보이는 실패를 벌써부터 두려워했다. 이 모든 걸 관통할 수 있는 단어는 역시 '자존감'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나의 자존감은 형편이 없다. 나 자신이 존귀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정해진 과제를 잘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만 느껴진다. 사람이 매 번 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기에 혼선과 어려움 그리고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은 나는, 그런 실수와 실패 하나씩이 너무 아프다. 나의 소용이 오직 실제적 효용에만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단하다. 늘 스스로를 당장 나부터에게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분명히 나도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예쁨을 받았겠지만, 자의식이 생긴 후의 나 자신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존재만으로도 잘 살고 있다는 식의 초라한 낭만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동시에 낮다 보니 남들도 인정할 결과물 없이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기 쉽지가 않다. 결국 무언가를 항상 추구하고 지향하고 이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가 내게는 삶을 무너짐으로 이끄는 지뢰가 된다. 정작 남들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일을 가르쳐주다가 그 사람이 실수를 하며 다음부터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면, 두 번만에 하나의 일을 통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며 앞으로도 실수는 많을 거고 그때마다 대충 넘기지만 않으면 된다는 얘기를 건네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따스함을 정작 내게는 조금도 허락하기가 어렵다. 그런 가혹함이 내게 미안하지도 않아서 문제다. 지은 죄도 없지만 마땅히 몰아세워져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남들에게 아주 상냥하진 않지만, 그 조금이라도 내게만 다정할 수 있다면 삶의 부담이 많이 경감될 것임을 알고는 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당장의 성과에 매몰될 뿐이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에게도 슬럼프는 있는데, 삶에 절벽의 순간이 없을 수 없다. 다만 나는 다시 올라오기가 유난히 더 벅차다.


어떤 영화에, 남에게는 먼지 같아 보이기만 하는 상처가 내게는 우주만 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반대다. 내게는 먼지 같아 보이는 게 남들을 얼른 병원을 가라는 크기의 상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이쯤까지 이르면,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따뜻하지도 못하다며 다시 큰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글쓰기를 할 때, 남들은 괜찮다고 하는 완성본에서도 정작 나는 언제나 지적할 부분을 여전히 찾느라 열심이었다. 삶도 마찬가지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는 남들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 모자람에 대한 동력으로 나는 나아가는 게 아니라, 버거움에 가라앉는다. 물에 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몸에 힘을 빼야 한다. 매 순간 지쳐있는 나는 힘을 빼는 법도 모른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예민해지고, 그 때문인지 주위에 상처의 말만 건네기도 한다. 모난 자신이니 괜히 말과 행동도 뾰족하게 된다. 그러면서 혹여 내가 상처라도 누군가에게 준 날에는, 다시 심하게 자책한다. 스스로를 감당도 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만 주는 모자란 나 같은 사람의 설 자리에 대한 의구심을 강하게 느끼기도 한다. 나도 내게 괜찮다고 하고 싶다. 그러면 좀 어떻냐고, 삶이 정체되거나 고여있거나 아니면 잠시 몇 걸음 퇴보해도 어떠냐고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달려온 비관이 내 입을 틀어막는다. 나를 가장 안아주고 싶은 건 나인데, 그럴 수 없기에 힘들다는 말도 힘들었겠다는 말도 스스로에게 건넬 수 없다.


행복에 대한 기대치는 없다. 행복을 통해 삶이 즐거워질 수 있음을 잘 알지만, 행복이 겹도록 힘든 가치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내게 있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건 '무탈한 삶'이다. 어쨌든 흘러는 갈 하루하루의 삶에 커다란 통증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여나 아플 일이 생긴다면 내가 나를 먼저 달래주고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러나 나는 내게 너무나 가혹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의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만 같은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특히 나를 안아주는 것의 층위에서 더욱 그렇다. 내가 나를 조금 더 가여워하고 불쌍해한다고,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실수들에 스스로만의 면죄부를 주며 합리화를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나를 못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인데, 이 소박한 청원마저 나는 기각하고 있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안쓰러움이든, 나 자신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네고 싶다.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을 응시하다가 어느덧 다가가 어깨를 다독일 수 있는 스스로가 되기를 바란다. 다 컸다고 생각함에도 갈 길은 여전하다. 이만큼 자랐음에도 갖추지 못한 걸 앞으로라고 가능할까 싶은 비관이 앞서는 걸 보면, 나도 나라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이마저도 책망뿐이니, 나는 참 내게 가혹할 뿐이다. 언제나 북반구 겨울 같은 나의 시선도 봄처럼 따뜻해지는 날이 올까. 여전히 세상은 춥고 삶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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