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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Apr 28. 2024

악뮤, '작별 인사'

    여긴 비밀 게시판이래요. 웃기죠. 비밀들이 넘실거리는 게시판이라니요. 서로의 욕망과 대면으로는 못할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부유하다 다시 모여요. 그 비밀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크고 작은 비밀들의 오고감을 보는 게 가끔은 퍽 재밌기도 해요.


    '비밀'이라고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한 장면이 생각나요. 사형수 강동원이 이나영한테, 자신은 비밀을 무덤까지 안고 간다며 비밀를 말하기에 자기처럼 좋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죠. 그 덕에 둘은 서로의 비밀과 상처를 털어 놓을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가까워졌어요. 어릴 때 이 영화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대사까지 다 외울 정도로 이 영화에 꽂혔었죠. 고작 10대 중반의 나이에 어떤 아픔이 있어서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나는 비밀이라는 게 좋아요. 너무나 말하고 싶지만 말하는 순간 비밀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리는 은밀한 위태로움에 매력을 느끼나봐요.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자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것을 서로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던 게 어쩌면 우리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비밀이었죠. 이제 우리는 알잖아요.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이 실은 꽤나 나약하다는 것을,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린 상대보다 우리 자신을 먼저 보듬게 된다는 것을요. 그건 사랑의 부족이나 결여가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철이 들어 자신을 지켜내는 하나의 소중하고 서글픈 방안이라는 것을 역시 너무 잘 알죠. 나이먹음이 주는 몇 안 되는 선물일지도 몰라요. 우리가 더 어린 나이에 만나 지금보다 훨씬 더 바보같은 시절을 나누었다면 우리 각자가 감춘 비밀은 조금 적어졌을까요. 뭐 이제는, 의미 없는 가정과 넋두리지만요. 바보인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나쳤겠죠. 우리 인연이 거기서 낭비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그저 삶이 마련해준 공간과 시간에 감사합니다. 아쉬움은 있어도 원망은 없습니다.


    즐거웠어요. 즐겁다는 말 참 오랜만이네요. 쓰고 보니 정말 즐거워지는 기분도 드는 신기한 단어네요. 아무튼 당신과의 시간은 내게는 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날들이었습니다. 저는 삶을 지탱하는 건 추억과 희망이라 생각해요. 우리에게 이젠 희망은 없죠. 서로의 안부가 들리는 것도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닐 거라 별로 기대하진 않아요. 각자 알아서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다 삶이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덮일 때 서로를 의미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거라면 작은 희망이라도 될 수 있을까요.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요. 굳이 뭣하러 그런 기억을 부러 안고 사나 싶은 마음이 더 큰 걸 보면요. 당신과의 즐겁던 시간 이후에 나는 조금 더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도 같지만, 원래도 낙천적이진 않았죠. 그래도 당신은 내가 가끔씩 짓는 웃음을 사랑해줬어요. 누군가의 웃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나의 웃음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정말 큰 행복이더군요.

    저는 우리 헤어짐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비롯된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비극이라니, 제가 좀 너무 몰입을 했나봐요. 의미없는 감정 과잉인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나 이 단어를 대체할 언어가 제 세계에는 없네요. 틀린 말도 아니긴 하죠. 우린 어쨌든 헤어졌으니. 둘 모두의 잘못이거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이라면 전 후자를 택할래요. 남은 삶을 죄인 혹은 전과자로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세상에는 죄가 있고 실수가 있어요. 실수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는 미숙함이나 어리석음 같은 말들이 있는 거겠죠. 삶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잠시 즐거웠던 우린 그저 그 문을 닫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냥 끝이난 거죠. 들여다 보면 마음 아리거나 가슴 미어지는 사연과 이유가 왜 없겠어요. 그러나 그것들을 굳이 탐구하고 싶지는 않네요. 미안함도 버린 채, 저는 고마움만 간직하려고요. 행복과 불행을 모두 느꼈던 시간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잖아요. 그러니 고마웠어요. 정말로요.


    작별 인사가 주절주절 참 길었네요. 원래 제가 또 사족이 많은 사람인 거, 누구보다 잘 아실테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아는데, 서로에 대해서만 문제가 나온다면 만점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아, 아니죠. 우린 사실 말 못하고 말 못할 비밀들을 간직했잖아요. 그래도 당신의 마지막 비밀을 조금 먼저 알았으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비밀을 끝내 숨기다 이내 털어놓은 당신이라고 마음이 아주 편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제 인사를 할까 해요. 마지막이지만, 그래서 너무 아쉽지만, 너무 아쉬워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릴 억 저 편으로 보내며, 저는 우리를 이렇게 기억할래요. '우리들의 즐거웠던 시간'으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몇 달 전 에브리타임 게시판에 올린 게시물을 조금 다듬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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