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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부터 무엇이든 배운다는 건

진정한 위로와 응원의 출발점

by 사랑의 천문학

밴드 콜드플레이의 곡 'Fix You'의 마지막에는, 실수로부터 배울 것을 약속한다는 가사가 있다.("I promise you I will learn from my mistakes.") 한 번역가는 이 부분을 '실수를 딛고 일어날 것을 약속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역시 전문가답게 가사의 의도에 더욱 부합된 번역이라 생각하지만, 조금의 오역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문자 그대로의 서툰 번역으로 여전히 이 곡의 마지막을 이해하려고 한다. 배운다는 게, 꼭 극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다. 나아가 실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하기에, 굳이 배움을 극복의 전단계로만 치부하는 게 아니라 배움 그 자체를 존중하고 싶은 고집이다. 미숙함과 어리숙함이 전제된 잘못으로의 실수는 대부분의 경우 잊고만 싶은 부끄러운 경험이다. 잊고 싶은 것들은 그런대로 잊혀야 삶이 무난히 지속될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내게 있어서 좌절은 좌절일 뿐이었다. 어떨 때는 거기서 무언가를 느껴 이후에 반영하기도 하였겠지만, 그렇다고 실패와 성공을 혈연관계 정도로 긴밀한 두 존재라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 실패는 실패고 성공은 성공이다. 그러니 내게 있어서 실패와 실수는 대부분 헛된 시간이었고 경험이었다. 실수로부터 배울 거라는 가사가, 굳이 실수를 딛고 일어서겠다고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그 경험이 마냥 헛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수와 실패를 마냥 공허의 영역에만 욱여넣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소중한 의연하고 담담한 삶의 태도 아닐까.


지난 날들 중 헛된 시간이 왜 없었을까. 당연히 누구에게나 헛됨은 존재한다. 마치 보물 찾기의 '꽝'처럼, 무의미함은 삶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다. 숱한 공허를 안고 우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 지난날이 헛되기만 했는지는 다른 차원의 질문이다. 헛된 날들은 있었지만 헛되지만은 않아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이, 어쩌면 위 가사의 본질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보기도 한다. 소중한 경험치로의 희망이다. 넓어지는 삶의 지평에서 우리는 종종 그리고 어쩌면 서글프게도 더 자주 '꽝'을 발견할 테지만, 그게 모두 너무 헛되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희망의 위로를 구할 수 있다. 희망과 위로는 귀하다. 노력의 가치가 지나치게 숭상되는 걸 그리 바라지는 않지만, 희망과 위로가 태만한 삶에서까지 손쉽게 찾아질 수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를 지탱하고 다독이는 무언가에 대한 탐구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이어져야 할 중요한 공부다. 삶은 임의적이고 좋기만 한 것만 우리에게 던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깊은 절망의 폐허에 꽤나 오래 고여있어야 하기도 한다. 좌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정의 내리기 전에, 우선 실패는 아프다. 실패와 실수는 어쩌면 통각을 통해 최초로 인지되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아프면 고통을 재빨리 멈추고 싶은 게 사람의 당연한 심리다. 어떻게든 진정된 아픔은 쉽게 삶의 어두운 역사로 편입된다. 때론 거기에 '헛된 시간'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실패와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다시 라벨을 떼고 그 위에 '그럼에도 무의미하기만 한 건 아니었던 시간'이라며 수정하는 번거로운 일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는 무언가 번거로운 짓을 기꺼이 해 볼 때 존재했다. 끔찍했던 실수와 실패들은 사실 떠올리기도 싫은 무언가다. 굳이 겪지 않았어도 될 것을 겪었기에 발생한 아픔이고 고통이었으니, 그저 실수와 실패를 '불운'으로 치부하는 게 더 속 편한 자세이기는 하다. 사람이 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해서 마주하는 건, 어쩌면 귀책사유를 지나치게 '불운'에게만 전가해서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이런 행동은 실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스스로가 미워지기 시작하고 그 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비난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테다. 그건 특별하리만큼 염치가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찌를 때의 통증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때론 뻔뻔하리만큼 주위를 탓하고 남을 욕해도 나 자신의 형편없는 모자람을 스스로에게 자백하는 일만큼은, 너무 큰 두려움에 머뭇거림이 느껴질 때가 있다. 실패와 실수를 통해 배운다는 건 결국 '용기'있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의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용기 없이 실패와 실수에게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잘못이라는 걸 겸허히 인정하고도 다시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존감도 가진 사람이지 않을까. 자책이 반성에서 머물고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되지는 않는 사람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어떤 순간에도 삶이 지옥으로까지 여겨지지는 않을 듯하다.


실패와 성공 간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용기와 희망의 밀접성은 충분히 가시적이다. 희망이 있기에 용기를 품을 수 있고, 용기는 다시 희망을 잉태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진실이 하나 있다면, 나는 꽤 많이 비겁했다. 덮고 피하는 데에 더욱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 직면할 용기를 쉬이 얻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비겁하게 회피했던 지난날이 헛되이만 보였다.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실수 자체가 발생했음에 무너지기만 했다. 사람이 발전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지기라도 해야 하는 삶이라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는 최선이어야 한다. 그동안의 나는 순간의 나를 감싸겠다며 비겁함을 택했지만, 이것이 내 작은 생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렇게 말했다고 당장이라도 모든 순간 당당하게 삶의 결과들을 직면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어쩔 때는 지금처럼 모른 척 고개를 저 멀리 돌리며 그저 불운했을 뿐이라고 왜곡된 두둔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제는 삶의 희망을 갖고자 한다. 단순히 불운한 헛된 시간이라고 옛 일들을 치부하지 않고, 그래도 배울 것들을 하나씩이라도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 속에서의 나를 솔직하게 대면하고, 위축된 내게 배움의 선물을 건네며 격려하고자 한다. 피함으로써만 삶을 지킬 수 없으니, 용기 내서 나를 보듬겠다는 말이다. 괜찮다고. 이런 헛된 순간들을 겪었음에도 어떻게든 살아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지금의 통증 또한 그런 과거가 될 거라는 선험적 위로를 내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게 때론 멋쩍고 낯설겠지만, 용기와 희망은 거저 가질 수 없는 가치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다.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배워 더 나은 사람이 되지는 않아도 된다. 딛고 일어서 실수의 아픔을 모두 털어낸 채로 치유되어야 한다는 당위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침체는 다른 침체를 야기할 뿐이다. 위축된 삶의 관점에서 희망이 쉽게 찾아질 리 없다. 하지만 희망이 있어야 우린 지난 시간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고, 그게 남은 날들에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희망이 우리 삶의 방파제이자 연고라면, 우린 꽤 많은 시간을 이를 찾는 데 투자해야 한다. 실수를 통해 배운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대면한다는 건 우리를 모질게 꾸짖는 게 아니라 되려 우리를 지키려는 소중한 노력이다. 그 용기가, 우리 삶에 절실히 필요한 진정한 위로와 응원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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