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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견뎠더니 가뭄이다

by 사랑의 천문학

미숙함은 미숙함이다. 서툰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어설픈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몫을 견딘다. 자란다는 건, 별개의 일이다. 그래서 문제다. 내 자람의 초라한 뼘은 시간의 보폭을 결코 앞지를 수 없다. 뒤처진다는 느낌은 꼭 남들과의 잔인한 비교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다. 하루하루 써 내려가는 답안지가 언젠가부터 장문의 오답이기만 하다. 조금의 부분 점수라도 받아보기 위해 겨우 첨언한 궤변들로 더욱 선명해지는 건 답안의 형편없음이다. 꼼꼼한 채점 없이도 시험 결과를 짐작할 수는 있다. 삶이 결코 완벽히 완성될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지나친 오만과 참혹한 체념 외 다른 방도로 삶이 완성됨을 느낄 길은 없다. 마지막까지 인생은 미완의 안쓰러움일 테고, 그 미약함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생은 어떻게든 이어질 테다. 어쩌면 별 뜻 없는 삶에도 미학성이 있다면 완성의 근사치에 애써 도달하려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적절하지 못한 수준의 결핍은 동기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무기력과 친해지게만 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게 이렇게 돼 버린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 삶의 어딘가가 비어있다. 빈곤에 가까운 공허다. 하지만 그 '어디'를 못 찾겠다. 누수는 이어지는데 달리 방도가 없다. 그리 채워진 적도 많지 않았던 그동안의 시간이었다. 가뭄이기도 한 생이다.


의연하고 싶었다. 굳건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 나이에는 의연하기라도 할 수 있지 않나 기대했다. 평소에 삶에 큰 기대가 없다. 그러니 품게 되는 바람들은 유독 소중한 것들이다. 만져보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야 소망한다. 의연함은 그 정도로는 근접한 줄 알았다. 세상이 무너지거나 스스로가 넘어질 때, 훌훌 털고 일어나 내일을 준비하지는 못해도 오늘은 버틸 정도의 의연함은 가질 나이가 된 줄 알았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시간의 선물은 기척이 없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 살아지다가, 살아내려고 애쓰다 보면 조금은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고 그래도 어떤 일들에는 '그러려니'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는 쥐어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욕심이라는 생각도 크게 들지 않았던 바람이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있어 보였다. 아팠고 어려웠으니, 그게 너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면 이 소박한 청 정도마저 반려될 줄은 몰랐다. 어리석었다. 미숙함은 미숙함이고 자람과는 무관하다고 뻔히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지난 통증을 훗날의 자양분이라 믿어버렸다. 아닌 줄 알면서도 믿지 않으면 안 됐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겐 희망을 가장한 그런 못된 환상이라도 절실했다. 의연함 정도에 닿는 것쯤은 어지간한 비관에도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전제가 잘못된 두괄식의 문단이니, 이 답안은 오답이 맞다.


안일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아픈 시간이 어지간히 지나고 나면, 그래도 초라한 자질 하나쯤은 삶에 남아있을 거라는 믿음에 근거가 없었던 건 맞았다. 그러나 그런 거창하지 않은 바람조차 사치라면, 대체 어디에 기대어 생을 견뎌야 하는지 모르겠다. 괴로운 통증이 결국 무가치한 아픔일 뿐이라는 진실에 무기력히 순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기어코 도래하는 것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하여 참담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버텨내고 마주한 임의의 내일이 여전한 무의미라는 건 또 다른 열패감만 증폭할 뿐이다. 그렇다면 삶은 완성에의 모자람을 성실히 채워가는 게 아니라, 무엇도 없는 바닥의 메마름을 아프게 확인하는 일이란 말인가. 그러기엔 내가 견뎌낸 혹은 견뎌내는 중이라고 믿고 있던 시간이 가엾다. 기어코 허무에 그칠 수밖에 없다면 노력이든 최선이든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좋은 일만 우릴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건 아주 어릴 때부터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진실이다. 누가 누구를 버리고 누구는 누구 때문에 마음이 다치고, 다시 다친 마음은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게 삶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우리한테 어떤 견고한 마음의 방어기제 하나 건설해내지 못한다면, 아픔을 이겨낸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살아있으니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충족시키는 것 이외에 그 노력의 기능이 있었는가. 그토록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이니 이젠 내게 만족스러운 보상을 달라는 청구서를 내밀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삶은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몰염치하다.


다들 어떻게 견디며 삶을 채워나가는 걸까. 이 행성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두 무기력한 체념 속에 하루를 소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는 발견된 '의미'가 왜 아직 내게는 찾기 어려운 걸까. 어떤 희망으로 사람들은 포기에 저항하고 있을까. 지금껏 찾지 못했던 가치가 어느 날 눈을 떴더니 환하게 빛나고 있을 리 없다. 그런 아침이 온다면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다. 삶에 던진 모든 물음에 적확한 답을 듣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련은 시련대로 던지고 그저 조용하기만 한 세상의 침묵이 나는 밉다. 의연함은 결국 선순환의 결과물이다. 삶의 공허와 빈곤이 그런대로 채워지고 어딘가의 누수에도 버틸 정도는 돼야 가능한 미덕이다. 그러니 의연함이란 건축물의 강직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그 안을 어떻게 채워가냐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를 갉아먹었던 기억들이 너무 많아, 무엇으로 그 넓은 공허를 채워야 할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물론 아주 어린 시절에 비해 동종의 경험에 대해 조금은 무감할 수는 있다. 자라긴 했으나, 그럴 수 있을 정도로만 자라 버렸다. 생을 의연하게 대하며 중심을 잡고 희망을 모색하는 삶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꽤 비싼 경험의 값어치를 치렀다고 생각함에도 미숙함은 여전하다. 그러고 이제는 사고의 회로는 무기력한 허무로만 수렴하려고 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무의미'라는 라벨이 붙은 서랍에 욱여넣어야 한다. 서글프게 반복되는 오늘의 수납이다.


폐허를 견뎠더니 삶이 가뭄이다. 오늘 서울에는 비가 꽤나 내렸다. 영원히 해갈되지 못할 갈급은 이런 소나기에라도 이만한 게 어디냐며 그런대로 만족하기만 해야 할까. 그 허무를 발견하기 위해 그토록 절실히 아등바등이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수고를 기울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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