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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기까지

앞으로의 커리어를 이제는 확실하게 정하며

by 사랑의 천문학

대학에 들어와서 공부를 안 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래버렸다.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졸업을 위해 적지 않은 수업에 참석은 했다. 기억나는 가르침은 단 하나다. 어떤 수업의 교수가, "여러분은 대부분의 삶을 임금 노동자로 살게 될 것"이라며 스치듯 말 한 문장이었다. 그게 무슨 과목이었는지도 희미할 지경이지만 모든 전공 수업들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어차피 회사에 들어가 시키는 일을 하며 나가라기 전까지 일하다가 나가라면 나가는 삶을 살게 될 텐데 경영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게 무슨 소용일까, 라고까지 깊게 생각한 건 솔직히 아니었다. 다만 저 문장이 스스로의 태만함을 합리화하는 데 종종 동원되기는 했다. 당장의 미래와 큰 연관도 없어 보이는데, 공부 좀 안 하면 어떤가 싶었다. 대학 입시까지 늘 해오던 공부였는데, 더 이상의 공부를 포기하는 데에는 작은 미련도 필요하지 않았다. 애써 들어온 학교를 깡 있게 뛰쳐나갈 배짱은 없어서 졸업만 하자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지저분하고 너절한 성적표지만 F는 없다. 다만 성실함을 증명할 알파벳도 없어서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상당한 절망을 겪어야 했다. '누가 죄인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접니다'라고 하겠지만, 이게 그 정도로 큰 죄였습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취업 준비의 나날들은 불행했다.


내겐 정량적 수치가 미비했고 정성적 독특함이 부족했다. 그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종종 우리는 창의와 혁신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신내림 따위와 비슷하다고 여기고는 하나, 대체로 깊고 성실한 공부를 통해 스님의 사리 같은 미약한 창의성이 발현된다. 아무튼 여기저기 지원하고 여기저기 떨어지다가, 한 회사에 선발되어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됐다. 최종 합격이었다. 그것도 대학 시절부터 만약 임금 노동자가 된다면 하고 싶었던 직무이기도 했다. 정직원이 되니 분주해졌다. 만들 것들도 많았다. 신용카드도 개설했고 주택 청약에 자동 이체도 시작했다. 회사 업무도 부리나케 배워야 했고, 그러면서 말로만 듣던 법인카드도 쥐어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너무도 오래 바라왔던 '임금 노동자'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존폐의 기로와 무관하며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기업이 주는 달콤함이 처음 일주일 정도 이어졌다. 그 심리적 안정감이 컸지만, 오래 음미할 수 없었다. 이유는 많지만 결론은 일이 생각보다 맞지 않았다. 변수였다. 무슨 일이든 성실히 묵묵히 그리고 남들만큼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든 그러지를 못했다. 실수가 많았다. 실수를 기소해야 되는 가장 첫 번 째 죄목은, 한 실수는 다른 실수를 야기하는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위축된 상황에서 서툰 신입은 무력감 이상의 두려움을 느꼈다. 취업만 하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내 미래를 과연 꾸릴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학만 가면 끝날 줄 알았는데 취업의 지옥이 있었고, 그 지옥에서 허우적대다 겨우 기어 올라오니 다시 나온 세상도 끔찍했다. 결국 나는 입사 시 지원한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일을 한다면 하고 싶어 했던 부서에서 나와 다른 팀으로 이동하게 됐다. 하나의 일이 모두에게 알맞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나마라도 흥미를 느꼈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너무 괴로워지고 그걸 이길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 신청을 할 때 마음 무너지는 열패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얘기지만, 그 이동의 순간은 아직도 내겐 참 괴롭게 기억된다. 그리고 옮긴 부서에서, 나는 어찌어찌 적응을 하고 조금씩 내 몫의 일을 해내고 있다. 크고 작은 인정을 받기도 하고, 감사한 신뢰도 종종 느낀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인지부조화가 있었다. 여전히 내 마음이 그나마라도 뛰는 건 이전 부서의 직무다. 그러나 무엇이 더 나의 적성에 맞는지 묻는다면, 지금 수행하는 업무다. 좋아하는 것만 할 수는 없는 세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삶을 위한 밥벌이라는 나의 해야 할 일을 지속 가능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잘하는 일을 택하는 게 조금 더 수월하다. 그런데, 그나마의 아쉬움을 굴복시키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괜히 여기저기 공고들을 기웃거릴 때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곳이 내가 돌아갈 직무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금 회사가 주는 모든 안락함을 포기하고 생초짜의 야생 같은 필드로 나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가슴 뛰는 생활을 해볼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비겁하게 혹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냉정하고 현명하게, 나는 머리의 결정을 따랐다.


여전히 결정 이면의 가능성에 조금의 시큰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최고의 동기부여는 '마감기한'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게도 나이가 선택을 분명히 내리게 작용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 정도에 대해서는 선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다. 도전과 미련함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때를 지나고 있다. 아마 지금의 일을 하면서 내 가슴이 뛰거나 대단한 도전정신과 성취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테다. 그러나 같은 양의 최선을 투입했을 때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과외를 하면서, 입시에서 노력의 총량을 친히 계산해 주는 대학은 없다는 비정한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만 중요하다는 소리였다. 마찬가지다. 업무에 대한 호감도로 나의 성과가 결정될 수 없다. 잘할 수 있는 걸 잘해야, 성과도 좋고 조금 더 안락한 삶에 정착할 수 있다. 아직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그래도 시도는 해보지 혹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낫지 않냐는 누군가의 말들도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음을 존중은 하지만 내 삶에 적용하지는 못하겠다. 자라며 배운 건 포기하는 법이었다. 사랑을, 꿈을, 기회를 언젠가부터 조금씩 잃었다. 이번엔 그게 직무에 대한 아쉬움이 된 셈이다. 모든 포기는 얼마간의 알싸함을 자아내지만, 모든 걸 버겁게 들고 삶의 여로를 완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때 그 직무에 잘 적응하였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볼 테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고 그 정도만 해야 한다. 살아낼 삶을 보듬는 최선은 잘할 수 있는 걸 잘 해내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럼에도 여기까지다. 작년까지만 해도 메모장 등에 조금은 일이 아쉽고 마음이 뛰는 일에 대한 동경을 토로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어찌 보면 그 사이 좀 더 자랐다. 자람에는 때때로 통증이나 씁쓸함이 수반되고는 한데, 이번에도 미열과 같은 성장통을 조금 앓았다. 하고 싶은 걸 능숙히 해내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해야 할 일을 서툴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소박한 능력이라도 있는 게 더 감사하게 되는 나이다. 최소한 여기에서의 업무는 나를 자괴감의 수렁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 짝사랑의 숨막힘보다는 건조하게나마 적절한 온도로 유지되는 연애의 안온함이 이제는 더 필요한 것과 같다. 마음을 몇 번이나 달래고 설득하며 이겨먹어야 했지만,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비겁함이다. 한때 동경했던 것들은 삶 어딘가 언덕에 쌓여있을 테다. 그곳에 이제는 완전히 단념한 바람 하나를 더 보낸다. 능숙히 그 업무를 수행해 내는 꽤 괜찮은 임금 노동자가 되고자 했던 시간이 길었고 때론 그에 미치지 못함에 눈물도 많이 흘렀다. 그 절실함이 닿아 한때의 소망이 너무 남루하거나 초라해지지 않게 안녕히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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