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다는 말은, 참 덧없게나 생겨 먹었다. 저리 생겨 먹은 글자에 덧없다 이외 무언가의 뜻이 보태지는 건 온당치 않아 보일 정도다. 덧없는 시절이라고 칭하게 되는 시간은, 그래서 정말 덧없는 날들일 뿐이다. 둔감함 이상으로 무감하고 무심한 날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비슷한 강도의 압박과 통증을 매일 겪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일 같은 무게를 조금의 요령도 없이 이고 있어야 했는데, 그걸 그저 덧없는 날들이라 뭉뚱그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덧없다고 믿었던 시절은 실은 죽어라 견뎌내야 했던 날들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이들이 묻는 고마운 의례적인 '어떻게 살아'라는 물음에 나는 '그저 그래'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현상에 대한 담백한 기술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썩은 환부를 감추는 자기 기만의 언어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니면 '그저 그런' 날들에 대한 진심어린 동경을 담은 나도 모르는 무의식적 발화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날들'은 지금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축복들 중 하나다. 스스로가 멀쩡하지 못하다는 걸 언젠가 불현듯 자각한 이후, 차라리 삶이 못나게 덧없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한다. 하필이면 몇 없는 바람이 지나치게 초라하고 못나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결혼을 언제할 지는 모르겠고 아이를 낳을지 아닐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주니어를 앞에 앉혀 두고 이 아빠가 덧없거나 덧없지도 못했던 시절을 지나며 보니 인생이 이런 거더라 따위의 이야기를 지껄일 기회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태어날지 아닐지도 모를 미래의 그 아이 뿐 아니라 내가 아끼는 주위들에게 건네고픈 마음은 하나 있다. 그들의 감정이 흑자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어려운 걸 알지만, 덧없지도 못한 날들 동안 내 옆에서 나를 지탱해준 이들에 대한 예의에 가까운 소박한 응원이다. 삶은 잃음으로써 얻음을 가능케 한다. 관용적으로 쓰이는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 불행하게도 진실뿐인 구절이다. 무엇을 내든 우리는 무엇이든 잃어야 하고 그 반대급부를 손에 쥐게 된다. 그게 때론 초라하고 볼품없을 수 있고, 또 어떨 때는 무엇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할 수 있다. 언젠가 시집 하나를 뒤적이다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라는 시구를 오래 응시했던 적 있었다. 우린 지속적으로 불행할 것이며 우리의 슬픔 또한 지속가능하다. 더욱 슬퍼지는 일은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숙명이다. 더욱 슬퍼질 수밖에 없는 생의 여로에서 누군가의 감정이 결국은 흑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건, 그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또 그게 가급적 많기를 희망하는 마음이다. 그 일이 나로 기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아끼는 이들은 음수의 감정값만 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할 자격은 내게는 전혀 없다. 그에 대해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역량과 식견 없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무엇이 그나마라도 괜찮은 인생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너무 음수만 지속되지 않는 삶이라고 어려운 문답을 완성할 테다. 이건 경험해서 어렴풋이 얘기할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는 것들에 얘기하고자 하는 내가 겨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서글픈 답변이기도 하다. 사는 건 슬픔이 갱신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슬픔만으로 갱신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아픔이다. 다른 걸 떠나서, 삶에 회의가 든다. 흑자와 적자를 오가든 그저 그렇든 덧없든이라도 해야 되는데, 내일과 모레에 새롭고 참신한 슬픔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삶의 지속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나에게 힘과 마음을 주고자 노력했던 이들만큼은 가까스로라도 그들의 삶에 슬픔만이 가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쉽게 단절해버리기 어려운 인생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가지게 되는 것만큼 아픈 사고의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로 또 그 다음 내일로 향하는 선형적인 선로 위에 있는데 그 흐름 자체에 반감이 생기는 건 삶의 관성과 중력에 대한 고통스러운 저항이다. 굴종의 열매는 달았다는 말은 비단 엄석대 같은 절대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인생과의 알력다툼에서도 적당히 순응할 건 순응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후세에 이름을 남길 철학자가 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다. 지금 내 삶이 무탈한 게 먼저다. 그런 게 그게 요즘, 무탈한 게 문제가 아니라 덧없지도 못했다.
애정하는 문장가인 신형철 평론가는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마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라고 희망을 지칭한 적 있다. 헛되지도 덧없지도 못하여 많이 아프기만 했던 지난 시간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다. 그 지난 시간을 그저 소각해버리고만 싶다면, 그럼 어떡하지. 소각해버린 잿덩이에서도 새로운 희망은 잉태될 수 있는가. 악순환이다. 희망을 자양분 삼을 지난 시간이 없고, 희망이 없어 미래를 견디기가 어렵다. 삶에 무감각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다소간의 무감함을 선물같다 여겼던 건 이따위 어려운 방정식을 스스로 겪어가며 결국 삶이 저 아래 음수에 위치한다는 걸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알아버렸다. 나는 열심히, 아니 정말 열렬히 슬픔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내게 건네는 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는 그 정도가 되면 그래도 좋은 일이 있었던 것 맞다고, 너의 인생을 부당하게 나쁜 감정들에 패배시키지 말라고, 또 본인의 삶이 우울에 침전될 필요는 없다고 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곁눈질이 아니라 나에 대해 모든 걸 소상히 알고 있는 나에게는 차마 그래도 어떻게든 음수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거짓을 고할 수 없다. 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그것도 꽤나 깊이, 마음이 많이 아픈 상태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희망을 빚을 만큼의 그런 저런 정도만 되는 지난 시간도 내겐 없다. 이미 뻔히 알고 있는 게 가끔 마음에 깊이 박힐 때가 있다. 진실은 여러모로 아픈 구석이 많은 녀석이다.
무언가를 쓰면서 무언가의 대안을 내놓은 적은 없다. 이번에도 역시 토로 뿐인 토로다. 그 어떤 생산성도 없는 지금의 이 글은 1년, 2년 그리고 그 이후에 돌이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과잉된 감상의 날들이었다고 조소할까 그때 참 어려웠다며 나를 다독일까. 후자 정도의 따뜻함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지만, 실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 전자이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지금이 마치 사춘기에 첫사랑을 열병처럼 겪는 아이처럼 비정상적인 감정 앓이를 하는 상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흘러, 마치 10대 시절만 떠올리면 마음 한켠에 멋쩍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지금에 대해서도 참 불필요한 감정들이 스스로를 많이 잡아먹었던 날들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좋겠다는 말을 내가 쓰고도 조금 마음이 알싸한 건, 아마 그러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다. 대단한 즐거움도 아니고 그저 그렇거나 덧없는 삶을 흠모하는 주제의 인생이면서, 이게 나중에 돌이켜 보면 단순한 철없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게 염치없어 보일 정도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생동안 죽지 않을 만큼만의 고통만 살면서 겪는다는 말에, 그 이상으로 아픔이 주어진 사람들은 다 죽어버렸으니까, 라는 비관으로 대응했던 적이 있었다. 적지 않은 글을 썼고, 그중에서 내가 그나마 만족하는 문장이 하나 있다면, '죽을 것 같은 일들에도 죽지 않고 버틴 경험으로 우린 감정의 면역을 얻는다'라는 구절이다. 슬픔이 나날이 갱신되는 요즘, 이 문장이 나의 종교고 종교여야 한다. 저 초라한 글귀가 정말 힘이 있을까. '그저 그런 날들'이, 내겐 너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