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기능과 역할에만 몰두하는 삶
요즘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죽고 사는 문제가 없다. 죽니 사니쯤은 돼야, 시선과 에너지를 투자할 만하다. 살며 마주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고 사는 만큼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무력하고 무기력하다. '무망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얼마 전 배웠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서 놀랐고, 그게 또 하필 이런 영역이라 다소 언짢았다. 미래에 대해 희망이 없다고 느낌은 감정이란다. 그 지수가 다소간 높게 나왔다. 희망, 이라는 예쁜 단어는 너무 예뻐서 문제다. 그저 말뿐인 말이라며 침을 뱉기에는 천진한 뜻뿐인 두 글자다. 내게 없는 것들에 대해 어쩌다 골똘히 염려할 때는 그것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고는 한다. 그러나 희망만큼은 그게 아니라 신형철 평론가가 기술한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란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구절에 의지하고 싶다. 그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지난 시간이 헛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바람이 최근 크다. 죽고 사는 문제가 없는 요즘 별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나를 안고 이며 살아야 하는데 그 지난 시간이 너무 무겁다. 헛됨으로 적셔져 물 먹은 솜처럼 가혹한 짐이다. 내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 헛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정도만 돼도 되는데, 삶은 종종 소박한 바람도 반려한다.
'무엇으로부터든지의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클럽'이라는 신기한 사내 동호회가 등장하기도 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 미정이 세상에 치이다 한 카페에 들어가 사랑받는 사람인 척 스스로를 속이며 되뇌던 장면이 선명하다. 미정은 무엇으로부터라도 해방되고 싶어 '해방클럽'을 만들어버리자라고 했지만, 실은 그녀에게도 '희망'이라는 게 필요했던 것 아니었을까. 구씨라는 사람과 서로를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사랑을 '사랑 따위'로까지로 격하하면서 했던 '추앙' 역시 '지금을 긍정'할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추앙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할 테고 그 사실이 자존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정의 말들은 그저 비어있는 채로만 삶을 유기하고 싶지 않았던 능동이자 절박함으로 보였다. 여유 부릴 사치가 안 되는 절박함과 그럼에도 껍데기의 인생 안에서 잔존'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숭고하고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세상에 나아갈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여 굳이 그 선택을 해낸 누군가의 마음을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잖아, 정도의 말로 폄하하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 행위의 동기 및 심미성과는 견줄 수 없는 높은 위치에 행위의 실행 여부가 있다. 미정은 해냈고, 노력했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런 의미에서 미정이란 보통 인물의 생이란 여정의 순례기이기도 했다. 순례길에는 걷는 것밖에 답이 없지만, 그 길의 모든 걸음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미정에게도 '추앙'과 그를 통한 '해방'이 유일한 선택지였겠지만, 이를 묵묵히 해낸 그녀의 선택에 찬사가 필요한 이유다.
그 선택이 더욱 위대한 게 느껴지는 건,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서다. 나는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게 자기 객관화고 지금 내게 부족한 게 '희망'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과 같이 어떻게든 현실을 움켜라도 쥐어서 조금의 균열이라도 낼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력하다. 무력은 어쩌면 무의미에서 출발할지도 모르겠다. 고민과 행동에 기능은 있지만 의미는 결여된 느낌이다. 어차피 세상에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는 야심 같은 건 진작에 없었으니 차치하겠지만, 나는 그런대로, 쓸모가 없지는 않다. 나 편한 대로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아주 불필요한 사람에게 회사가 매 달 꼬박꼬박 월급을 넣어줄 리는 없다. 초라하지만 별일이 없다면 아마도 오래 수령할 급여 명세서가 나의 소용의 소중한 증거다. 그래서 문제다. 만약에라도 그게 사라진다면 나는 세상에서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사람이 된다. 아니, 꼭 그러지는 않을 테다. 어디 한 구석에서라도 내가 작은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곳 한 군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무너질 테다. 이 급여명세서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게 된 세상에서 나를 증명해 낼 자신이 없다. 그건 내가 일이든 일 밖에서든 의미를 느끼거나 창출하지 못하니 '역할'이라도 하면서 자존을 채우겠다는 서글픈 간절함 때문이다. 그러니 위태롭고, 위태로운 날들에 무기력이 타파될 리 없다. 당연한 악순환이다. '추앙'이든 '해방'이든, 나는 삶의 의미 자체가 결여 돼 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희망의 정의에 따라서 나는 희망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철학적인 가사의 한 구절처럼 그런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무슨 의미도 찾을 수 없던 지난날들과 현재의 집합체가 '헛되지 않음'의 감정을 선사할 리 없다. 치사하고 비겁할 거면 나약했던 유년시절로 변명할 수는 있고 모질고 객관적이려면 이후에도 게으르고 태만했던 나를 탓할 수도 있다. 가끔의 즐거움, 당연히 있었다. 의미가 없다는 게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비관에 가득 찬 사람에게도 가끔의 웃음과 놀람은 있는 법이다. 우울이 촉발하는 눈물의 양에도 상한선이 존재한다. 그러니 삶의 의미가 그때도 지금도 없었고 없다는 말은 내가 매 순간 죽을 듯이 아프고 괴로웠다는 건 아니다. 다만 무엇 때문에 그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했던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그건 지금도 그렇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더 있다면, 나는 20대 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어려운 시간을 겪었다는 점이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많은 병리적 지표를 통한 정량적 평가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그러다 다시 돌아간 것 같기도 하는 상태에서 표류하고 있다. 전후 트라우마처럼 내게도 질문 하나가 가시지 않는다. 그때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사투를 벌여야 했을까. 그때 내게는, 정말 매일이 문자 그대로의 죽고 사는 문제였다. 그날들을 거쳐 지금이 되어, 나는 그 아팠던 시간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내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괴물에 잡아 먹혔던 끔찍한 시간에서도 구할 수 있는 의미를 어디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으며, 희망이 너무 요원하다.
별 생각이 없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깊이, 오래, 잠들어 있고 싶기만 하다. 아주 긴 잠을 자고 일어난 언젠가가 된다면 많은 기억들의 희석되고 가라앉아 아픔에 가려졌던 가엾은 의미를 겨우 명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순간도 있다. 그럴 수 없어서, 또 타의로라도 당장은 그래질 수 없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기능을 다한다. 그거라도 해야 나의 자존이 호흡할 수 있으니, 어쩌면 그 고마운 기능은 내게 있어서는 일종의 연명치료일지도 모르겠다. 죽고 사는 문제는 아직은 아니니, 그냥 내 몫의 일들을 담담히 겪고 처리해야지. 그러기엔 밤이 너무 늦었다. 어떤 순간에는 이런 수신인 없는 푸념이 멈추는 날이 올까. 그건 멈추는 날일까 멈추어지는 날일까. 아무래도 밤이 너무 늦었다. 희망이고 의미고 뭐고, 오늘의 잠이라도 꼭 무탈하고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