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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란 법은 없다

매 번 지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말

by 사랑의 천문학

죽으란 법은 없다. 올해 좋아하는 팀의 야구를 보면 느낀 점이다. 물론 응원하는 팀이 잘하는 건 절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못하고 있다. 그것도 정말 못한다. 글이 말보다 매력적인 구석이 있는 건, 그래도 사람이 최소한의 체통은 지키게 한다는 점이다. 그나마의 품위라도 지키며 말하자면, 우린 못한다는 말도 초라할 만큼 못하고 있다. 이 더운 날씨에 야구도 못하니 여름이 더욱 지옥이다. 직업이 선수임에도 야구를 못하는 그들의 마음이 더 불편할까 아니면 그들에 대한 응원이 매번 실패하는 우리의 절망이 더 클까. 그들은 돈이라도 버니, 우리의 실망을 괘념치 않고 꾸준히 못하는 그들이 대단한 게 맞긴 하다. 그런데 또, 가끔은 이긴다. 이러다 탕진하겠다 싶어 포기하려던 순간 갑자기 아차 하나 뽑히는 인형도 아니고, 어쩌다 승리를 하기는 한다. 어느 날은 어쩌면 우리가 돈을 받고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경기력이다가도, 어쩔 땐 쉽게 이겨버린다. 그러니 이게 야구고, 이딴 게 야구라 차마 끊을 수 없다. 지난 주말 야구를 보고 나오며,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매번 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올해 우리 팀의 야구를 종합하면 한 구절이다. '줄곧 진다.' 그런데 '줄곧'이란 말은 곧이곧대로 생겨먹은 스스로의 모양새와는 다르게 여백이 있다. 즉, 이기는 날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가끔은, 이기기도 하는 팀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 진학을 준비할 때였다. 지금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전형이 뷔페에 가깝도록 많아 보이는데, 다행히 내가 고3일 때는 이 정도로 경우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를 가장 잘하면 어디든 가겠다만, 예든 지금이든 나처럼 애매했던 학생은 이런저런 전형들을 따지게 된다. 원래 월드컵에서도 경우의 수를 따지는 나라들은 실력이 뭔가 모자란 팀들이다. 아무튼 한 전형을 위해서 서류를 준비하는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써내야 했다. 읽은 책이라고는 읽으란 책들 뿐이었는데 이게 무슨 택도 없는 요구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부조리한 구조에 항거할 배짱은 없다. 있어 보이는 책 두 개는 골랐는데, 읽은 게 원래 없으니 고를 마지막 책이 없었다. 그때 골랐던 마지막 책 하나가 맨날 지고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질 팀을 응원했던 마지막 팬클럽에 대한 소설이었다. 수능을 코앞에 두고 공부하기 싫어서 몰래 읽었던 책이었는데, 마음에 와닿았다. 당연히 이기면 좋다. 이겨서 나쁠 게 없다. 가위바위보도 이기는 게 최고고, 왜 이렇게 귀찮게 만드는지 모르겠던 어린 시절 체육 대회도 어쨌든 이기면 기분이 좋다. 그러니 승리야 말로 다다익선인데, 문제는 승리만 할 순 없다는 게 삶의 본질 깊숙이 있다는 점이다. 승리만 하는 인생도 물론 있겠지만, 그게 전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만 귀속되는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기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때로 삶은 너무 천진하고 태연하게 패배를 건넨다. 그런 무너짐을 감당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니 그 소설은 매일이 붕괴되는 프로야구팀의 마지막 팬클럽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었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야구단에 대한 기억은 이후 꼭 승리하지만은 못한 본인의 삶과도 어떤 궤도로 이어졌다. 그게 막바지 고3 마음에 무겁게 남았고, 덜컥 그 책을 세 번째 책으로 써버렸다. 사실, 나처럼 애매한 애는 저런 보통 아닌 모습이 있으면 좋겠다는 전략적 판단이 아예 없었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책은 여전히 감명 깊게 마음에 남았다. 패배란 고3의 숙명적 불안이자, 그 불안은 삶에 영원히 수반될 열패감과 좌절의 태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몰락과 무너짐이 패배라면, 그리고 비참하게도 관대하게 숱한 절망들에까지 '졌다'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린 너무 많은 패배들에 상처받고 살아야 한다. 사랑에 실패하는 것도 패배다. 무엇인가에 도달하지 못한 것도 패배다. 마음 품은 누군가와 오래 사랑하고, 마음 먹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건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우승의 피날레를 맺고야 마는 화려함보다는 '줄곧 지는' 야구팀의 옹색함에 더욱 가깝다. 패배는 아프다. '쓰라린 패배'라는 관용구는 많이 쓰여서 익숙한 게 아니라 모두의 공감이 있기에 말이 되는 어구다. 패배는 자기 책망과 때론 혐오까지 불러오기에 더욱 위험하고 괴롭다. 올해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더욱 미웠던 건, 어쩌면 그리 승리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내 인생과 많이 닮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팀이 지난주 나의 야구장 방문 때는, 어찌어찌 이겼다. 기대와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갔던 야구장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최근 많은 불편한 감정들을 안고 살고 있었다.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야구팀의 패배에마저, 내 인생은 야구마저도 뜻대로 안 된다며 아주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짜증을 부리고는 했다. 그러던 팀이 이겼다. 전날에는 패배를 목도했기에 더욱 소중했던 승리의 경험이었다. 여전히 순위는 낮다. 그래도 현장에 방문하는 야구팬에게 중요한 건, 순위는 일단 모르겠고 내가 가는 날 이기는지 아닌 지다. 그 중요한 날, 이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죽으란 법은 없는 가보다'라는 말이 나왔다. 주로 지는데, 지지만은 않는다. 패배가 많아도 패배뿐인 팀은 아니다. 무언가가 많다는 것과 그것이 전부인 상태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다수를 차지하는 패배가 끝내 우리 팀을, 그리고 어쩌면 내 삶을 완전히 잡아먹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다. 별 거 아닌 경기 하나가, 어쩌면 오래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야구는 통계의 스포츠고, 통계란 모집단에서 경향성을 발견해 내는 학문이다. 시즌 말미가 됐고, 우린 통계적으로 높은 확률로 남은 시즌동안 이기기보다는 더 많이 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매 경기를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날의 승리로 우린 '내년엔 다르다'라는 희망을 품을 테고, 올해가 그 거름이 될 거라 믿고 싶어 할 것이다. 바람에서 그칠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마냥 헛될 거라며 뭉뚱거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게, 내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낙관이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이 정도의 낙천적임만 있어도 조금은 덜 괴롭게 하루씩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야구팀이 가끔만 이겨도 되는 건 아니다. 그들만은 잘하기를 바라고, 잘해야 한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가끔씩은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 것처럼, 나 역시 수없이 많았던 멈춤의 가능성에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스스로가 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서글프지도 구태여 부러 애상적일 필요도 없는 담백한 명제다. 그럼에도 우리는 힘든 날, 애써가며 ‘죽겠다'라는 말을 연발한다. 부끄럽지만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나도 모르게 '죽겠다' 혹은 '죽고 싶다'를 자주 올리고는 했다. 그랬던 내가 나도 모르게 지지 않았던 한 경기를 보며 '죽으란 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 경기가 나를 살릴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는 분명 아닐 테다. 하지만 삶이 얻을 수 있는 위안의 범주는 넓고 때론 너무 소박한 진실이 큰 위로가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줄곧 지는 팀도, 늘 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뜻대로 마음처럼 안 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별 상관없는 두 문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붕괴 때 야구팀의 형편없는 성적을 보며 다시 인생을 비관했는데, 그 반대로 야구팀이 모처럼 지지 않았다고 생을 아주 잠시 가엾이 여기는 것도 안 될 건 없다. 이런 게 흔히 말하는 '정신 승리'겠지만, 원래 야구팬이 제일 잘하는 영역이 그것이다.


지지만은 않는다. 못하는 야구도 못난 삶도, 지지만은 않고 매번 무너지지만은 않는다. 죽을 것 같아도 죽으란 법은 없다. 아마도 내 모난 성격에 너무 쉽게 잊을 경험 같아서, 그 잊음이 휘발되기 전에 남긴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았기에 우린 감정의 면역이라는 걸 얻는다고, 이전에 내가 썼음에도 자주 잊는 문장이 있다. 그건 다시 기억하지 못해도 되니, 삶에 한 번쯤은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말이 내뱉어졌던 순간이 있다는 것만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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