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의 의미만 더 있었으면
다들 그러고 산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무겁게 얹힌 적 있었다. 다들이라는데, 그들 중 나는 없다. 서글픈 소외였다. 유난이거나 나약하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난과 나약 중 뭐가 덜 비참할까 고민하였고, 택일의 문제일 필요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유난스럽게 나약하다. 마음 따뜻한 고마운 사람들은 나를 위로한다. 버티고 있는 게 나약할 순 없다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삶의 소란스러운 훼방에 이끌리며 무력하게 순응할 뿐이다. 그러니 버틴다는 능동보다는 아직은 존재한다는 무기력에 가깝다. '아직은'이 참 마음에 걸린다. 죽지 못해 살다가 죽을 때가 돼서 죽게 되는 삶에 뭐 다른 의미가 있나 싶다. 아직은 살아있으니 살아있을 뿐이라는 초라한 진실이 최근 내 삶의 요약이다. 태어남이라는 물리적 현상 자체에 어마어마한 함의가 있을 리 없다. 그리 거창한 걸 부여하고도 때때로 그 이상을 앗아가는 비극들을 보면, 차라리 생과 사는 세상의 회계장부에 기록된 차변과 대변의 숫자 하나씩에 가깝다고 믿는 게 현명해 보인다. 그러니 탄생과 존재에 깊이 탐구되어야 할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어찌 보면 오만한 생각이다. 다만 하필 내가 세상에 모습을 하고 나온 사람이라는 종은 어제를 열렬히 기억하고 내일을 가까스로 준비하는 생명체다. 정말 하필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은 후회하고 절망한다. 그 둘을 애도하는 게 유독 버거울 때 생은 공허해진다.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철학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소양도 없다. 다만 이건 믿음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있다고 믿는다면 무엇이든 의미로 삼을 수 있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때론 구도자가 되어 생을 항해할 수 있다. 찾으면 간증이고 못 찾으면 순례기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을 씻고 봐도 삶에 의미 비슷한 무언가라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게 원효대사 해골물도 아니고 국어사전을 뒤져 멋지고 적당한 걸 골라 이런 게 의미겠지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의미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게 없다고 믿으니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그럼 지금이 너무 허무하다. 뭘 위해서,라는 삐딱한 물음이 자연스레 생긴다. 뭘 위해서 이렇게 견디고 버텨야 하는가. 당연한 것들에 의심을 품는 건 위인들이나 위인 될 사람에게나 좋은 일이다. 나는 평범하며, 후세에 남겨질 이름도 아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건 그러려니 하면서 사는 게 좋다. 의미 같은 걸 고민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 번 의구심이 드니 자꾸만 생각들이 파생되어 고달프다. 사람도 그릇에 맞는 고민을 가져야 한다. 당장의 현실도 버거운 마당에 인생의 의미까지 고민하고 있으니 여간 답이 없는 게 아니다. 이전에 '꿈'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 있었고, 굳이 '꿈'이 없어도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인생이 비로소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미'는 조금 다르다. 의미가 없다는 건, 정말 말 그대로의 '무의미'는 '헛됨'인데, 헛되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는 서글픔이 자꾸 회의감을 야기한다.
보통 생의 의미에 대해 한 줄이라도 결론을 낸 사람들은 치열한 고민 끝에 우리에게 본인의 이름을 기억시킨 사람들이다. 대부분 철학자 비슷한 사람들이었는데,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면 결국 그들의 직업이 그런 것 아니었겠는가. 내 직업은 회사원이다. 주는 일 받아서 수행해 내고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가끔은 그 이상 일하기도 하는, 평범하게 밥벌이하고 평범하기 위해 고단하게 밥벌이하는 직장인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과잉으로 가지려거나 유세를 부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생활 자체가 재미와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일상이기도 하다는 변명이다. 벌이가 있는 건 맞지만 그 사실만으로 의미의 존재가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어떻게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삶이 '당위'로만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는 낭만은 버린 지 오래다. 애초에 그런 희망 따위는 품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해야 할 일들로만 삶이 채워진 것은 조금 서글프다. 쉽게 말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진정 내가 원하는 걸 찾아보라고 한다. 말뜻은 헤아릴 수 있지만 곱게만은 들을 수 없는 무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면 얌전히 지금의 삶을 수용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겠지. 안다.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 정말 노력하며 순간에 열심히 임한다. 그래서 매월 말마다 내게는 급여명세서를 확인하는, 아주 잠깐 가슴 따뜻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이야기지만, 의식주 측면에서의 생의 존립이 위태롭지 않다고 유의미한 인생이 되는 건 아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고, 그래야만 하는 이야기다. 이마저의 삶도 누군가에겐 바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의미'는 다른 측면의 이야기다. 고단한 현실에서도 그 현실이 긍정된다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다. 밴드 데이브레이크의 '머리가 자란다'라는 노래에는, '왜 눈물이 흐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에 목이 마른 것도 돈이 없어 슬픈 것도 아닌데'라는 구절이 있다. 꼭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이들에게만 의미의 결여가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의미에 대해 찾아가는지, 혹은 그에 대한 발견을 갈구하는지 궁금하다. 나도 내가 '꿈'에 대해 미련을 버렸던 것처럼 '의미'에 대한 추구도 유기해 볼까 생각했던 적 있다. 지금이라고 구도를 하듯 의미를 찾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현실을 무엇으로 버텨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 없는 고민은 떠나지를 않는다. 질문이 너무 괴랄할 정도로 추상적이어서 그렇다. 그러니 우린 삶의 단계별로 그 지점의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며, 그게 어쩌면 의미라고 생각하고 살고는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의미 같은 건 상관없이 일단 앞으로 달리게만 하는 추동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나 역시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이 지금 내 현실이 다소간의 정체기 혹은 성숙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20대 때 나를 흔들었던 격동은 더 이상은 없고, 다시 마주하게 된다 하더라도 전혀 반갑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안정이 좋다. 다만, 그 안정감이 안주를 수반하여 더 이상 더 큰 의미를 발견할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은 있다.
어떻게든 살아는 내고 있는 삶에, 어찌어찌 제 몫의 인생은 해내려고 노력하는 마당에,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느낌이다. 잃어버렸다는 건 가졌던 적이 있다는 말인데,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리는 게 말이 되나 싶기는 하다. 그러나 마음 안 어떤 중요한 게 사라진, 정확히 말하자면 '증발'의 형태에 가까운 실종 상태인 것도 같다. 의미를 찾는 건, 힘든 순간에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이 마음 저림도 결국은 헛되지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의 증거가 필요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를 못 믿는 마당에 종교 등의 거창한 무언가에 그 과정을 의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나 자신으로 왜 존재해야 되는지가 다만 궁금할 뿐이다. 어쩌다 내가 태어났고 어쩌다 내가 때가 되어 죽는다는 그 선분 사이의 지점들과 선에 대한 답이 있다면, 조금은, 수월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결국 그런 걸 평생 연구하고 결론 지은 학자들도 서로 죽어라 싸워댔는데, 나라고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겠냐고. 어쩌면 이건 정말 답이 없는 사고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때로는 답 없는 것에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아주 조금 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는다. 또 당장의 아픔에 신음하지 않고 '의미' 씩이나 되는 무언가를 고민할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그동안의 시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갈망이다. 그게 언제 출렁일지 모르기에 지금이 조금은 더 소중하다.
정말,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어찌 그리 멀쩡히 잘 사는지 조금은 궁금은 하다. 혹은 나처럼 멀쩡치 못함에도 멀쩡하기 위해 노력 중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 "누구 씨는 살아온 것에 비하면 많이 밝게 잘 컸다!"라는 말을 들었다. 에이,라는 말과 함께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 말이 마음 깊게 내려앉았다. 나 같은 사람이 밖에서 밝아 보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나 스스로 체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간마다 애쓰고 있으니, 또다시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지키고 붙잡을 무언가가 하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무너짐이 무섭다. 생이 조각조각 붕괴되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이 한두 번 혹은 그 이상 내 삶을 방문할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럴 때, 조금은 내가 평온하길 바란다. 어쩌면 그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의미라는 생각에, 이렇게 처량하게 의미 타령이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