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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07. 2023

그럼에도, 어쨌든 삶이니까

    세상에 나올 때 뭐가 그리 바빴는지, 나는 꼼꼼함과 야무짐을 미처 삼신할머니로부터 받아오지 못했다. 정돈된 책상과 정리된 주변, 그리고 정갈한 글씨는 이때까지 오래도록 가져본 적 없는 미덕이었다. 어떻게 보면 게으르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애초에 꼼꼼하고 야무진 인생을 추구하지를 않았다. 그런 내가 유독 강박과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의 정돈됨을 추구하는 건 '전자기기 속 세상'이다. 거기서 만큼은 모든 게 제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음악을 어릴 때도 참 많이 들었는데, 그 많은 음악들이 가수별, 그리고 앨범별로 정리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다. 모든 어플리케이션들은 카테고리에 맞는 폴더 안에 어여삐 들어가 있어야 하고, 음악들과 사진들 역시도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래야 평화 비슷한 게 마음에 찾아온다. 참 쓸 데 없이 피곤하게 산다는 걸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핸드폰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들을 제 위치에 어울리는 폴더에 넣기 위해서였다. 정리할 사진들은 의외로 별로 없었다. 생각해보니 근래에 무언가를 사진으로 남길 일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느꼈다. 요즘 참 건조하게 살고 있었구나.


    건조한 삶이 꼭 나쁘지는 않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감정 기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지만 나의 감정이 때로는 아주 깊은 밑까지 도달할 때도 있기에, 지금의 잔잔함이 마냥 지루하거나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렁이는 출렁임보다 무기력한 안온함이 내게는 훨씬 낫다. 언젠가는 살아있는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세상이 매 순간 천국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일이 천국이더라도 그렇다면 그게 몇 성 급 천국인지에 대해 매일 상대평가를 해댈 성격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냥 '세상은 그저 세상이겠지' 정도의 담백하고 감흥 없는 체념이 싫지 않다. '오늘'은 앞으로 남아있는 나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라는 뉘앙스의 격언을 본 적 있다. '오늘'은 지나온 나날들 중 가장 늙은 날이다. 아직도 젊은 내가 벌써부터 이리 체념적인 게 맞나 싶을 때도 있지만, 이때까지 살아온 시간에 따른 경험치는 다소간의 무기력과 무력을 긍정케 한다. 마침 계절도 가을의 초입이다. 어쩔 수 없는 중력에 그토록 초록이었던 잎들도 우수수 떨어지는 무기력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계절도 어쩔 수 없이 겨울에 삼켜질 것이다. 겨우 조금 나이를 먹었음에도, 이 어쩔 수 없음의 순환에 괜스레 위안을 얻는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간절하고 절실했던 무탈함과 평범함이다. 지극히도 무탈한 평범함의 기저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고생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아프게 깨달았던 지난 1년이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무엇도 이루지 못 한 채로 무엇이라도 되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기약 없던 도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내게는 꿈과 야망이 없고, 그러니 도전과 경쟁을 너무도 싫어하는 나였지만,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했다. 무엇도 이루지 못했으니 무엇이라도 되는 게 절대 쉬울 리 없었다. 밥벌이의 숭고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밥벌이의 수단의 동아줄에 손을 대는 것조차 그렇게나 어려울 줄은 몰랐었다. 연속된 실패에 나날이 아팠다. 실패는 언제나 새로운 아픔이었다. 붕괴된 희망에서는 생을 지탱할 무언가가 없었다. 벽이 지지리도 높았다. 내가 자초해서 만든 벽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니 나는 나를 찌르고 미워했다. 추락하는 자존감을 붙잡을 도리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득함이 가장 무섭고 두려웠다. 그 시간을 애써 버티고 견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지 못해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라는 표현이 아마 적확할 것이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삶이 건네는 상처들에 조금은 무던히 대할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최초로 뻔뻔히 내뱉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열렬히 증오했다. 지금도 거기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아등바등은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1년 전 즈음에는 깨지 않는 잠이 유일한 구원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라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게 손톱만큼이라도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수능을 앞둔 자녀를 둔 한 친척이 내게 "대학만 가면 그래도 괜찮지?"라고 물은 적 있었다. 대학 입시로부터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택도 없는 소리죠'라는 문장을 최대한 공손한 단어들로 조탁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다. '뭐만 하면' 또는 '뭐가 되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희망은 그저 부질없을 뿐이다. 한 고통을 숨이 차게 뛰어넘으면 다른 단계와 차원의 아픔을 맞이해야 한다. 끔찍하게 부조리한 진실이고, 그 진실에 저항해봤자 스스로만 더 괴로울 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야 경감되지 않는 아픔을 조금은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괴로운 한 시절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미약한 굳은살을 생성할 정도의 힘이 '있을 수는' 있다. 물론 그 티끌 같은 가능성의 굳은살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감당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포츠 게임 정도를 제외하면 게임에 아예 손조차 대지 않고 지냈다. 아주 어릴 때 역시 그 흔한 카드놀이에도 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쟁은 정말 선천적으로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건 그나마 즐겼던 스포츠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속 경기에서 이기면, 나는 승리를 쟁취했다는 뿌듯함보다 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니 만약 지는 경기가 있다면, 조금 비겁하지만 저장하지 않고 그냥 게임을 꺼버렸다. 그리고 패배의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어쩌면 사람이 느끼는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처럼 인생을 리셋하거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성취든 패배든 어쩔 수 없이 삶에 자동 저장되고 동시에 삭제 불능으로 남는다. 게임을 많이 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실력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니 스포츠 게임을 할 때도 나는 늘 강팀을 선택했다. 실패할 확률이 낮아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과 승리를 놓치는 순간들이 번번이 있었다. 하물며 게임도 그런데, 삶이라는 리그에서 그리 강팀도 아닌 내가 모든 실패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패가 야기하는 감정의 진폭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되돌릴 수 없음의 절망과 좌절이 시리게 다가오기도 한다. 참 건조한 요즘의 삶인데, 그게 나쁘지는 않은 아니 오히려 괜찮기까지 한 이유다. 그래도 실패의 아픔을 느낄 일이 그래도 별로 없으니까. 밖에 비가 조금씩 내리는 모양이다. 내일 아침에는 어쩔 수 없이 오늘보다 조금 더 많은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이 이토록이나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 위태로운 건조함을 침범하는 실패와 아픔이 분명 어쩔 수 없이 찾아올 테다. '앞으로 다 괜찮고 잘 될 거야' 따위의 소리는 불가능한 주문이다. 괴로움이 찾아오면, 별다른 감흥과 감정이 없는 지금을 되려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축복 같은 '별일 없음'이다.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기에, 거기에 굳이 사진으로 남길 만한 하루도 아니어서, 말하자면 오늘이 너무도 평범한 날이어서 굳이 사진첩에 사진 하나를 보태지는 않았다. 사랑이든 일이든 무엇 때문이든지 삶이 아파할 때, 사진으로 기록할만했던 하루는 오히려 더욱 아득히 멀게만 보일 것이니까. 그럴 때, 괜찮을 수 없는 시간들에 애써 괜찮아지려고 소용없는 애를 쓰는 대신, 지금과 같이 안온한 그리고 조금은 건조한 보통의 날들을 기원하며 묵묵히 삶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쨌든 삶이니까. 게임을 꺼버리듯 그냥 무작정 삶을 종료해버릴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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