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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07. 2023

디어 클라우드, '사라지지 말아요'

비록 살아지는 삶일지라도

    안녕, 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발음이 우선 좋다. '안'과 '녕'이 만난 '안녕'이라니. 관계의 시작으로도 그리고 끝으로도, 정말이지 이만한 단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안녕으로 시작하여 안녕으로 끝나는 이야기. 안녕의 다른 온도가 다소 서글프지만 그래서 더 뭉클하다. 안녕, 안녕, 그리고 안녕. 굳이 따지자면 나는 작별로서의 안녕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서로의 안녕을 비는 애틋함과 따뜻함의 온도가 좋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게 빌어주었던 안녕의 온도만큼, 내가 다만 안녕하기를 바란다. 거창한 행복은 그리 자주 없어도 되니 이왕이면 무탈하고 가급적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가 내리면 그냥 그 비를 맞고 젖으며,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살아지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고,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삶의 제일 큰 원동력은 다름 아닌 살아있다는 관성이 아닐까 싶었다. 인생에 대단하고도 거창한 의미라는게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자각이 든 것도 이 때 쯤이었다. '사라짐'과 '살아짐'의 경계에서 여러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지금도 그 질문들에 별다른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얼마 전,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의 영상 일부를 보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걸 보며 한참을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참 많은 눈물을 쏟았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다르다. 그건 각자가 내쉬는 숨의 무게 역시 다르다는 의미일 테다. 아주 가쁜 숨을 내쉬며 인생이라는 여로를 걸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최선을 다하여, 죽을만큼 노력하여, 잔존하려고 할 때였다. 아마도 드라마 속 주인공과 같은 바람이었던 것 같다. 누구라도 나의 삶을,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지난 26년간 자존감이 높았던 적이 딱히 없었으니, 앞으로도 자존감이 높을 일은 요원할 테다. 별로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좋아할 만한 구석도 없다. 야망이나 의지, 꿈 같은 것도 내게는 없다. 정말로 그저 살아지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자주 무기력하고 무력하다. 반드시 이루겠다는 원대한 목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내일을 준비하는 착실함과 성실함과도 거리가 멀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함부로 애틋하게>의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정진해나가는 사람들이나, 오늘을 디딤돌 삼아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삶이 그저 게으른 인생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어도, 나는 어쨌든 살아 있다. 살아가지는 못해도, 살아내고 있고, 살아지고 있다.


    살아지기에 오늘을 살았고, 살아질 것이기에 내일을 살 것이다. 그러면서 살아내야 할 현실들을 하나씩 마주할 테다. 살아내야 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만은 않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 내게 있어서는 더없이 큰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수 요조의 노래들 중 '나의 쓸모'라는 음악이 있다.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 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이라는 가사가 있다. 어쩌면 이처럼 태어남 자체에도 숭고한 의미 따위란 없다는 생각이다.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살아있으니 살아내는 것이다. 너무 허무한가. 하지만 나는 그 허무함보다 어떻게든 인생에 의미를 주입하려는 강박이 더욱 끔찍하다. 살아감, 살아냄, 살아짐의 이름들이 서로 다른 건, 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찾으면 물론 좋을 테다. 하지만 나는 살아내야 하는, 또는 살아지는 삶들의 어쩔 수 없음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을 살아내야 하는, 또는 살아지고 있는 삶들이,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나는 날은 없더라도, 불행하지는 않은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생이 살아지면 어떻고, 또 그렇게 살아지는 인생을 살아내면 좀 어떤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지고 있고, 최선을 다하여 그 살아지는 삶을 살아내는 인생을 어떤 자격으로 폄하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분명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살아지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지는 삶을 살아낸다. 살아짐과 사라짐의 경계에서 오늘도 살아지는 삶을 살아냈던 모든 인생에게, 무탈한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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