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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09. 2023

<청춘시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의 이야기

    "안타깝게도". 불합격 통보는 보통 저 다섯 글자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안타까울 정도였으면 나를 뽑았겠지. '당신은 불합격입니다'라는 간단한 구절을 이렇게 돌려 돌려 말을 하는 것도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라는 구절을 확인하는 순간, 실낱같던 희망이 맥없이 붕괴됐다. 불합격은 지옥이다. 그저 고통스럽다. 물론 누군가는 떨어져야만 하는 구조다. 이걸 몰라서 힘든 게 아니다. 억울함도 없다. 나보다 나은 지원자들이 세상에는 널렸는데 뭘 어쩌겠나. 누군가보다 '더 나은' 지원자가 되기 위해 그 사람들은 내가 투자한 것 이상의 노력을 성실히 기울였을 것이다. 수치와 횟수가 그들의 역사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걸 다 알면서도 막상 스스로가 '누군가는 반드시 떨어져야 하는 구조'에서 그 '누군가'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고통을 야기한다. 책을 내기 전,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거의 그만큼의 거절 메일들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비슷했다. 귀하의 원고가 부족한 게 아니라 다만 출판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아서 출간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취지의 완곡한 표현들을 무수히 많이 확인했다. 많고 많은 불합격 통보들을 접하며 문득 원고를 투고하고 좌절했을 때가 생각났다. 불합격은 언제나 참 괴롭다.


    소득은 없고 소모만 있던 지난 몇 개월이었다. 세상 어딘가에 최소한 한 곳쯤은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준비를 시작했었다. 오만이었다. 나 자신이 이곳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처참히 실패했다. 서류에서부터 탈락한 곳들도 있고, 면접 끝에 인연이 닿지 않은 곳들도 존재한다. 처음 서류만 냈을 때는, 면접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컸다. 뭔가 한 마디라도 말을 해야 결과가 납득될 것처럼 느껴졌다. 서류 전형이라는 아득하게 높아만 보이는 장벽만을 기필코 넘고 싶었다. 최초로 서류가 합격된 날, 그래서인지 무척 기뻤다. 드디어 면접이라니. 누군가가 시간을 할애해서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니. 그렇게나 힘들게 막상 보게 된 면접들은 참으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내 부족함의 바닥은 어디인가 싶었다.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아팠다. 원망과 후회가 교차했다. 아직 20대인 내게 무얼 그토록이나 많이 바라는지. 그러면서도 다른 20대들은 해내고 성취했던 걸 왜 나는 하지 못했는지. 시대와 세상을 탓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런 시국에도 누군가는 합격을 한다. 내게 있어 가장 만만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 계속해서 나를 찌르고 괴롭혔다.


    나는 성공이나 성취의 기쁨보다 실패의 쓰라림이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런 와중에 성취는 없고 실패만 있으니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기가 조금은 힘든 날들이다. 술을 마셔도 본질적인 고통이 사라지거나 무뎌지지 않았다. 불합격의 아픔은 합격의 기쁨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는 한 친구의 말이 무척 와 닿는 요즘이다. 나는 꿈이 없다. 직장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또한 없다. 어쩌면 내가 견지했던 삶의 이런 방향성이나 지향점 자체가 태생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재활이 끝나지 않는 야구선수가 끊임없이 전력투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건넨 적이 있다. 여기까지 버티고 견뎌온 게 대단하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야박한 사람이라서, 남들도 다 견뎌내는 걸 뭘 혼자 그토록 유난을 떨었나 하는 생각이 앞선다. 결과물이 없으니 그때 그렇게 내가 힘겹게 던진 공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모든 투구가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났던 것 같다는 자괴감도 심하다. 일어서야지. 다시 공을 던져야지. 스스로를 채근해보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무기력에는 바닥도 없는 듯하다. 그저 끝없이 침전되고 있는 것만 같다. 희망이라는 등대에서 반짝이는 불빛도 너무 희미하고 미약해서 그냥 하루하루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정말로 지리멸렬했던 지난 몇 달이었다. 이 지리멸렬함을 다시 또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저 절망스럽다. 엄두가 잘 안 나고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 번의 경험이 있으니 다음 도전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단단한 확신은 없다. 오히려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그냥 나이만 한 살 더 먹을 뿐일 텐데, 다음에도 이 모양 이 꼴이면 어떻게 하지. 실패들의 찬란한 향연을 한 번 더 겪고도 나는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쨌든 한 학기 동안 참 간절했던 도전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무엇도 남겨두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생활을 시작하고 문자와 이메일 하나하나에 긴장하고 얼어붙으며 초조했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이번에는 제발 좋은 소식이기를 기도하다시피 하면서 문자와 이메일을 확인하고는 했다. 현실은 잔인하고 냉혹했다. 뜻대로 되는 일은 정말 별로 없었다. 아플 정도로 빈약한 가능성에 괴로워했고 손톱만큼의 가능성에 간절하게 매달렸던 날들이었다. 언젠가는 이 생활이 어떤 형태로든 끝날 것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거기에 지금보다 더 큰 좌절과 실패 또한 미래의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다. 삶은 원래 불행하니까. 좋은 것만 주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그런 날이 와도 괜찮으니 어서 지금의 괴로움이 끝나 다음 불행을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나는 성장통의 신화를 그리 믿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이고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고통과 치유 사이에 선후관계는 있을지언정 인과관계는 없다. 모든 괴로움이 성장으로 수렴되는 건 아니다. 고통은 그저 고통 그 자체로 삶에 머무른다. 기약 없는 미래는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무엇도 되지 못한 채로 이렇게 남아있게 되었다. 이 여정의 끝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반복되는 실패가 못 견딜 만큼 참 괴로운 요즘이다. 많이 지치고 힘들다. 생을 지탱할 무언가를 찾기 어렵다. 취업 준비라는 거, 참 아프고 고된 소모전이다.



    2년 전 이 글을 쓰고, 그 이후에 저는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제게 찾아왔던 좋은 운이, 혹시 아직 많이 초조하고 불안한 분들이 계시다면 전달이 되면 좋겠습니다. 회사원으로서의 삶이 좋고 말고를 떠나, 불합격은 그저 고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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