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낼 수 있는 끝없는 믿음을
프로야구팀 삼성 라이온즈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승엽은 어린 시절 나의 유일한 영웅이었다. 중학교 수행평가 때 존경하는 인물로 그에 대해 발표할 정도였다.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로 요약되는 한일월드컵 이후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꿈을 이룸에 있어 불가능은 없을 거라는 섣부른 확신이 사회 전체로 널리 공유되었다. 이루지 못한 꿈은 간절함과 노력의 부족이란 원인이 쉽게 진단되던 날들이기도 했다. 나의 영웅 이승엽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극적인 홈런을 치며 대표팀의 금메달에 일조했다.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불가능할 거라 쉬이 겁을 먹는 것도 안 되었다. 도전과 성취는 기본적인 미덕이었다. 진정한 노력과 간절함만 있다면 어떤 불가능이든 초월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 논리 체계 아래에서는 실패라는 결과의 책임이 개인에게만 오롯이 돌아왔지만, 그에 반감을 가지는 건 당시 학생으로서 암묵적으로 금기됐다. 그때 내가 느낀 세상이 그랬고, 조금은 유별난 교육열을 자랑하던 우리 동네는 그게 조금 더 심했던 것 같았다.
노력에는 상한선이 없다. 일분 혹은 한 시간이라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노력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소모적이라 느껴졌지만, 그에 대해 고찰하는 낭만을 가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란 진정한 노력을 방해하는 요소였을 뿐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쯤, 나는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처절한 실패였다. 이후 만회하면 된다는 허울뿐인 소리는 내 열패감을 나아지게 할 리 없었다. 기울인 노력의 진정성의 순도가 100프로였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도 사람이니까.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진정함에 아주 근사했던 노력이었고, 세상에는 배반하는 노력도 있음을 얼핏 알게 되었다. 영웅의 격언에 의구심을 품게 된 계기였다. 이후의 삶에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사이, 어릴 적 영웅은 은퇴했다. 마지막까지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며 은퇴를 한 그였다. 이승엽은 나의 마지막 영웅이기도 했다. 조금 나이가 들었더니, 영웅이라는 신화적 무언가가 마음에 도통 생기지 않았다. 노력의 배신이 생각보다 왕왕한 세상에서 그 모든 걸 초월한 듯한 인물 역시 찾기 힘들었다. 어쩌면 영웅이란 존재가 불필요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영웅 대신 롤모델 혹은 멘토로서의 누군가가 생겼다. 나의 젊은 날을 함께 하고 있는 밴드 '넬(NELL)'이다.
나의 10대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삼았다면, 그 이후의 삶은 넬의 보컬 김종완이 말했던 '비가 오면, 젖어야겠죠'에 빚을 지고 있다. 비가 오면 젖는다는 이 단순한 명제가 오래전 내 마음에 쿵 얹혔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던 세상 속에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체념적인 인정에 왜 그리 마음이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안간힘을 써도 노력의 배신을 막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건 학업이나 커리어적인 성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나 관계 등에서도, 실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고 느껴지고는 한다. 생각보다 노력은 무력하다. 아무리 뜨거운 간절함을 가져도 결국 단 한 줌도 쥐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삶에 내리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아픔들을 '비'라고 생각하면, 비에 무방비한 우리는 그 비에 그대로 노출되어 옷이 젖는 걸 지켜봐야 한다. 그중에 어떤 비는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의 폭우일지도 모른다. 김종완의 말을 접하기 전 내가 느낀 세상은, '비가 오는 데 우산은 왜 챙기지 않았냐' 묻고, '우산도 없으면 빨리 뛰어서 조금이라도 덜 맞을 생각을 하는 게 맞다'며 나를 힐난하고 채근하던 곳이었다. '비가 오면 젖어야겠죠'는, '어쩔 수 없이 홀딱 젖어버린 너의 몸과 마음임을 잘 안다'며 되려 따스히 날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넬 노래의 본질적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주간 노들섬 라이브하우스에서 넬의 공연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막회차에 갔고, 클럽 콘서트가 컨셉이었던 만큼 달리는 곡들이 많았던 셋리스트에 행복해하고 열광하며 에너지를 원 없이 소진했다. 간만의 스탠딩 콘서트에 나이 듦을 실감하기도 했지만, 또 이런 매력에 스탠딩을 간다며 웃기도 했다. 'Burn'이라는 공연 타이틀만큼이나 뜨거웠던 무대였다. 공연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선포하는 'Ocean of Light' 때 한 공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주고받는 에너지가 아직 잊히지 않는다. 넬의 공연에 개근하고 있지만, 아주 먼 훗날 다녀왔던 공연들을 떠올릴 때 가장 인상 깊게 기억될 회차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했던 시간이었다. 모두의 순수한 소모들이 모여 커다란 감동이 만들어졌다. 공연의 제목만큼이나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늘 그렇듯 좋아하는 모든 노래를 라이브로 듣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지만, 그건 다음 공연을 기약할 원동력이 된다. 아쉬우면서도 벅찬 마음을 안고 뜨거웠던 공연장을 나올 때, 밖에는 비가 부슬비처럼 조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못했던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비가 오면 젖어야겠죠'라는 말이 다시 상기됐다.
비의 내리고 그침은 어찌할 수 없다. 최소한 아직까지 내가 알고 있는 부박한 과학 상식으로는 그렇다. 그러니 비라는 건 때론 아주 무례하게까지 문을 두드리며 내 삶에 침범하는 것들의 상징이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내가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상실과 좌절로 인한 모든 고통들이 필연적으로 성장통이 되는 건 아니다. 괴로움에서만 머무르는 아픔도 존재한다. 지독한 아픔을 겪으며 죽지 않고 살아낸 덕에 얻어내는 게 한 줌의 성장이라면, 그런 성장이 뭐가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마음이 어두울 때, 넬의 음악은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자'는 메시지를 건네지 않는다. 일어날 힘조차 없는 이를 억지로 잡아당기며 할 수 있다는 강박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의 음악은 내 옆에 함께 주저앉아 무심한 듯 어깨를 내어준다. 마치, '기댈 거면 기대' 이런 느낌인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며 그 어깨에 기대어 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실은 나도 그랬어'라는 위로가 먼저 들린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건 아픔 그 자체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왜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아플까'라는 자괴감으로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넬의 음악은, 사람이 아픈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거고, 그 슬픔의 결격 사유를 판단할 권리 따위란 누구에게도 없다며 내 손을 잡아준다. 그러면서 최소한 자신만큼은 많이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최근의 넬의 음악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그들 노래의 어깨에 기대 하염없이 울거나 슬퍼하는 내게, '이제 잠시 내 얘기를 좀 더 들어봐'라고 하며, '그래도 말야'라고 얘기를 꺼내는 듯하다. 넬의 새로운 음악들에서 나는 희망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 희망은 무책임하거나 맹목적인 낙관과는 결이 다르다. 되려 아픔의 서사들이 힘겹게 수렴된 안쓰러운 희망이다. 넬에게도 영원히 잊힐 것 같지 않던 지난날이 있었고, 그날들에서 받았던 절대 아물지 않을 듯했던 상처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요즘의 넬은, 되려 무모했던 그날들이 그립기도 하다는 말을 건넨다. 비가 오면 젖어야겠지만, 때론 그 빗속에서 춤을 출 수도 있는 거라는 이야기도 잊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어렵고 살아냄은 고되며 상실의 아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지만, 흉터는 남아도 상처의 괴로움만큼은 조금 줄어들 수 있다고 넬의 음악은 이야기한다. '나도 그랬어'라는 공감이, '너 또한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나처럼 지난날을 오히려 그리워할 수 있고, 그러니 설사 지금 아픔이 있더라도 무모함을 너무 겁내지는 말기를 바라'라며 따스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넬의 음악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은 데에는, 보편적인 또 때로는 특수한 아픔들이 그들만의 언어와 멜로디로 표현된 데 있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넬의 음악은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다음 세대에게 '괜찮아질 수도 있다'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작위적이거나 위선적인 싸구려 언사가 아니라 삶의 길을 걷다 보니 나오게 된, 그래서 더욱 값진 위로다.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의 무게를 결코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운 누군가라도, 자신에게 닥친 한 불행의 인과관계와 선후관계를 명징하게 파악할 때까지는 유의미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어쩔 때는 스스로를 돌보고 북돋아주는 것조차 싫어지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들도 존재했을 테다.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또 누군가로부터 알맞은 위로를 받기도 참 어려운 요즘이다. 너무 많은 것들이 막막하게 느껴진다. 불안은 종종 나를 잠식한다. 때론 내일마저 싫다. 삶의 지속이 버거운 순간들이 많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이게 괜찮아지는 날이 오기나 올까'라는 회의감이다. 그럴 때 넬을 듣는다. 넬의 과거 음악들을 들으며 나만 이렇게 아픈 게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이 밴드의 최근작들로부터는 어쩌면 지금의 고통도 저 노랫말들처럼 그리워할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라며 옅은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럼 언젠가 지금 나의 날들도 '아름다웠다'고까지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다가올 날들에 그래도 '바람' 혹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넬과 내게는 10년 이상의 터울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라면, 나 또한 넬처럼 지난날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며 덜 아픈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용기를 얻게 된다.
롤모델 혹은 멘토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 넬은 희망을 준다. 희망만큼 귀한 게 없는 시대에 희망을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넬을 내 청춘의 롤모델이라 칭하는 데 모자람은 없어 보인다.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은 실은 무척 고되다. 아주 많은 역경을 지나고 용을 쓰며 달려왔다고 생각해 뒤를 돌아보면, 막상 확인되는 건 출발선으로부터 겨우 몇 발자국만 떨어져 있다는 초라한 현실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삶은 어떻게 보면 희망과 절망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진동이다. 희망과 절망의 팽팽한 균형에서, 손쉽게 절망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희망으로 향하려는 힘들지만 가치 있는 걸음들이 결국에는 유의미한 지점으로 삶을 옮길 거라 믿는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말이다. 넬의 음악은 이 버거운 줄다리기 중에 듣게 되는 공감의 응원가고 위로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버티고 견디며 나아간다. 절망의 순간마다 '이겨낼 수 있는 끝없는 용기'를 기원하고, 애써 버텨보며 '눈부신 빛의 파도'를 꿈꾸며, 자괴감이 드는 순간마다 '우린 달랐을 뿐 잘못되진 않았어'라며 되뇔 수 있는 그들의 음악이다.
그렇게 언젠가는 '그땐 잘 몰랐고, 그래서 무모했고, 또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며 회상할 수 있는 날이 꼭 있으리라 믿으며, 비가 오면 그냥 젖고 때론 그 비 아래서 춤을 추기도 하며 생을 이어가야지. 노력의 배신에 아파하고 절망하는 날들도 있겠지만, 그들의 노랫말들처럼 끝내 무너지지는 않을 테다. '내게 하는 약속'인 셈이다. 생의 연속성을 골똘히 의심하고 회의하던 내게 이런 희망을 주는 참 고마운 밴드고, 그러니 나의 롤모델이자 멘토는 내 청춘과 궤를 같이하는 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