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emian Writer Jun 19. 2023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사랑이라는 한 문장과 마침표

    헤어짐은 슬프다. 이별의 마침표는 역시 아프다. 이별을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하여, 헤어짐을 성장통과 등가의 의미로 여기는 건 옳지 못하다. 이별은 이별이고, 아픔은 아픔이다. 헤어짐을 통해 우리는 많은 걸 배우지만,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한 우리에게 '우리였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의 이유다. 지금보다 어렸던 어떤 날에는, 이 끔찍한 역설 앞에서 대책 없이 울기만 했던 때도 있었다. 이제라고 이 아이러니에 대해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동어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열렬한 사랑 끝에 찾아오는 이별은, 대부분의 경우 어쩔 수 없는 결정이고 선택이다. 연애의 시작과 끝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라면, 관계의 길이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시절의 기억을 어떻게 간직하는지 아닐까. 한 사람의 삶을 시라고 생각해보자. 상대방을 나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며 열렬히 사랑했던 날들의 기억은, 인생이라는 시에서 가장 빛나는 연과 행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어느덧 여름이 끝나간다. 참으로 뜨거운 날들이었다. 유례없는 폭염이었다고 여기저기서 난리였는데, 그렇게 유례없던 폭염마저도 환절기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력하다. 여름의 끝에 오니, 이 더위와 이별하는 게 마냥 후련하지 만은 않다. 한 계절이 이렇게 흐르는 게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계절과의 이별도 이러니, 세상 모든 헤어짐에는 어느 정도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듯하다. 열렬한 사랑을 일컬어 '열애'라고 한다. 누군가를, 그리고 그 누군가와 열렬하게 사랑했던 기억은, 한 사람의 생에 '뜨거운 여름밤'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밴드 잔나비의 노래들 중에,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는 굉장히 볼품 있는 제목의 음악이 있다. 이 곡은 "그때 난 어떤 맘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나는 사랑을 한 계절에 비유하는 걸 좋아하는데,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던 날들은 어쩐지 한여름과 잘 어울린다. 그렇게도 뜨거웠던 여름밤은,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버렸"던 '그대' 때문에 저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화자는 노래한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라고.


    노래의 첫 소절을 듣고, 나는 다소 무력해짐을 느꼈다. 가진 걸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고 미안했던 지난 시절의 어떤 연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감정의 크기라는 대단히도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를,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하며 계산 없이 사랑했던 날들이었다. 그 날들과 밤들이, "그때 난 어떤 맘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라는 쓸쓸한 첫 소절에 녹아있는 듯했다.  뜨거운 여름밤만큼이나 치열하게 사랑했지만, 남은 건 볼품없는 이별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끝. 남은 게 볼품없다고, 여름날 느꼈던 더위까지 무의미하지는 않을 테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걸 볼품없지만'은, 뜨거운 여름밤이 남긴 볼품없는 한 줌의 기억을 손에 쥔 채 다시 삶을 살아갈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느껴졌던 곡이었다.


    사랑은, 그래서, 그럼에도, 그러니까, 그래도, 그리고, 하지만, 등의 무수한 접속사들로 이루어진 '한' 문장이다. 그러니 이별은, '그래도', '그럼에도', '하지만', '그러나'에도 찍히지 않았던 마침표를 마침내 찍고 길고 긴 문장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흔히들 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이별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결혼에 성공하는 연애보다는 이별로 귀결되는 연애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별이라는 마침표는, 대부분의 연애가 공유하는 보편의 결말이다. 결국에는 이별하고야 마는 연애는 그럼 모두 실패인 걸까. 한 사람과의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별이라는 저 마침표의 유무인 것일까. 헤어짐이 사랑의 성공일 리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이별에 '실패' 혹은 '새드'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 역시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진다. 이별의 여부보다 더욱 중요한 건, 한 사람을 만나서 이별하기까지 써 내려갔던 문장의 온도 아닐까. 사랑의 추억이라는 문장은, 한 사람의 생에 빛나는 연과 행이 될 테다.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던 여름밤이, 그렇게 선명하고도 따뜻한 추억으로 화자의 마음 안에 남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넬, 'Sober'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